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하남면 용암리 일원의 북한강 유역에 형성된 충적대지 상에 위치하는 선사시대 대규모 취락[주거지] 및 매장유적으로서 지금까지 북한강유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 중 가장 큰 유적이다. 이곳은 북한강이 남류하는 해발 106m 내외의 완만하고 평탄한 충적평야지대로서, 북서향하는 구릉의 말단부가 북한강과 맞닿아 있어 선사시대부터 주민들이 생활무대로 활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자연 · 지리적 환경과 조건을 갖고 있다.
이 유적은 2002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화천 부다리고개 사토장 부지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야외노지 1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7기, 굴립주 건물지 1동이 확인되면서 알려졌다. 또한 2002~2003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화천생활체육공원 조성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야외노지 1기, 청동기시대 주거지 170기, 수혈유구 35기, 굴립주 건물지 13동, 추정 움무덤 12기, 돌널무덤 1기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2007년 예맥문화재연구원의 화천 생태영상센터 조성사업부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21기와 수혈유구 23기 등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주거지가 발견되지는 않았고 야외노지 2기만 확인되었다. 노지의 평면형태는 원형에 가깝고, 내부에 불에 그을린 자갈돌 위로 흑갈색의 재가 쌓여 있는 구조이다. 규모는 1.1×1.2m 정도이다. 주변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3개 지점에서 주거지, 굴립주 건물지, 수혈유구, 움무덤, 돌널무덤 등 다양한 생활유구와 매장유구가 혼합, 조성된 대규모 유적으로 확인되어 유적의 분포가 상당히 넓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주거지[집자리]는 형식분류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되지만 각 단계도 중복관계가 확인되고 있어 최소 6회 이상 반복적으로 점유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거지의 주축방향은 대부분 강의 흐름과 나란한 북동-남서방향이나 일부 직교하는 것도 있다. 평면형태는 장단비에 따라 크게 방형, 장방형,세장방형으로 구분된다. 세장방형 주거지는 비교적 대형급으로 대부분 면적이 50㎡ 이상이며, 내부에 노지 35기, 중앙주공 37개, 저장공 4개 이상이 설치되었다. 장방형 주거지는 면적이 10㎡ 내외의 소형급도 있지만 대체로 17㎡ 이상의 중형급이 많고 최대 63.7㎡까지 확인된다. 방형 주거지는 면적 25㎡ 이하의 중 · 소형급이 많고 최대 30.2㎡까지 확인된다. 중 · 소형급 주거지는 내부에 노지 13기, 중앙주공 13개, 저장공은 1~7개 정도이다.
주거지 내부에는 중심주공, 노지, 작업공, 이색점토구역, 저장공 등이 시설되었다. 주거지들은 중앙주공의 배치에 따라 노지를 중심으로 하는 소비 · 저장[생활]공간과 작업공, 또는 이색점토구역을 중심으로하는 작업[생산]공간으로 엄격히 분리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 주거지 1/4 정도는 화재로 인해 폐기되었다. 화재 원인으로는 전쟁, 역병이나 전염병, 부주의에 의한 실화 등 여러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혈유구[저장구덩이]는 평면형태에 따라 방형, (말각)장방형, 원형, 타원형으로 구분된다. 대체로 면적이 6㎡ 내외로 굴립주유구와 함께 창고와 같은 주거지 부속시설로 추정되지만 모두 동일한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굴립주유구는 정면 1칸에 측면 1~2칸으로 이뤄진 것이 많고, 정면 및 측면 모두 2칸, 정면 3칸에 측면 1칸인 것이 있다. 대부분 수혈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박은 뒤 빈공간을 암갈색점토질이나 황갈색점토를 채운 구조이다. 주거지와 공존하던 것도 있으나, 대부분은 집자리를 파괴하고 설치되었다. 굴립주유구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고상식가옥의 창고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추정 움무덤은 강의 흐름과 대각선상인 남북방향의 열상으로 배치되었다. 유구 내부에서는 별다른 시설은 확인되지 않지만 2단으로 굴착된 것도 있다. 평면형태는 대부분 장방형이며, 길이 111319㎝, 너비 85137㎝이다. 유구의 평면형태, 구조, 토층양상, 배치상태 등으로 보아 움무덤으로 판단하고 있다.
돌널무덤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네벽을 세우고 뚜껑돌을 덮은 구조로, 크기는 50×50㎝이다. 유 · 소아용 또는 2차장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물은 대부분 집자리에서 출토된 무문토기와 적색마연토기 등의 토기류와 석기류가 대부분이고 일부 장신구류[치레걸이류]와 토제품이 있다. 토기의 종류는 발형토기 · 호형토기 · 옹형토기 · 각형토기 등으로 구분되며, 토기 문양은 무문양, 공렬문, 구순각목공렬문으로 시문되었다. 석기류는 석부 · 석촉 · 석검 · 석창 · 반월형석도 · 지석 · 연석 · 방추차 · 어망추 · 부리형석기 · 원판형석기 · 타제석기 · 검파두식 등 다양하며, 용도에 따라 벌목구, 수렵구, 목재가공구, 석기가공구, 식량처리구, 방직구로 구분된다.
화천 용암리유적은 지금까지 3차례 정도 발굴조사가 시행되었으나, 전체 유적범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아 유적 내에는 시기를 달리하는 선사 주거유적이 매우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드러난 용암리 유적 · 유물의 양상만을 놓고 볼 때, 이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2~6세기에 북한강 유역의 충적대지를 무대로 생활하였던 대규모 취락유적으로서 각 단계의 물질문화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유적은 전기의 문화유형 가운데 하나인 서울 역삼동유형의 한 갈래로 추정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과 달리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거쳐 중기에 이르러 새롭고 독특한 지역적 문화유형인 이른바 '북한강유형'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유구와 유물의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취락의 형태는 전기의 장방형과 세장방형을 중심으로 하는 구조에서 과도기를 거쳐 중기에는 방형 주거지 중심의 구조로 변해간다. 주거지 내부시설은 전기에 확인되지 않던 작업구역에 작업공이라는 특수한 시설이 발생하고, 중기에 이르면 좀 더 발전된 형태인 이색점토구역이 등장하기에 이르며 거의 전체 주거지에 일반적인 시설로 채택된다. 또한 중심주공의 배치에서도 전기에는 확인되지 않던 내측주공이 단계를 거치면서 점점 많은 주거지에 설치된다. 주거지 변화와 함께 전기부터 시설되던 수혈유구는 늦은 단계가 되면 거의 사라져 굴립주유구로 대체되고, 이 과정에서 움무덤이 새로운 묘제로 등장한다.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취락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주변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다양한 경제활동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천 용암리유적은 취락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집자리와 다종 · 다량의 석기가 출토됨으로써 청동기시대 북한강 유역의 생활문화를 파악 · 복원하고 주거건축 발달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구멍무늬토기 문화 양상과 그 전파경로를 밝혀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향후 춘천 신매리유적, 중도유적, 우두동유적, 천전리유적, 거두리유적 등과 더불어 북한강 유역의 선사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화천 용암리유적은 북한강상류의 충적대지에 입지한 청동기시대 대규모 취락유적으로서 지역의 청동기시대 물질문화 연구에 큰 획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문화연구에 큰 성과를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그동안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강원 영서지역의 청동기시대 전기와 중기의 구분을 가능하게 하였고, 전기에서 중기로의 취락의 변화과정과 물질문화의 연속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