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한탄강 지류인 남대천 등 여러 하천들이 서쪽 가까이 흐르고 있고, 남쪽과 동쪽 그리고 북쪽은 높은 산들이 둘러싼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지대로서 선사시대 주민들이 생활하기에 매우 적합한 자연지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유적의 존재는 2003년 와수리 신벌지구 경지정리 사업지구에 대한 강원고고학연구소의 문화유산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으로 알려졌고, 2004년 강원문화재연구소의 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대규모 집단 취락유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조사결과, 청동기 및 철기시대 주거지로 추정되는 유구 30기와 굴립주유구 1기, 원형수혈유구 3기, 구상유구 1열 등 모두 35개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서 내부조사가 진행된 청동기시대 주거지들은 모두 4기이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 세장방형, 방형으로 구분되며, 장축방향은 대부분 동-서방향이나 일부는 남-북방향으로 직교하는 것도 있다. 주거지의 면적은 약 10~35㎡로 중소형급에 속하나, 4호 주거지는 80㎡를 넘고 있어 대형급에 속한다. 주거지 내부에는 중심[중앙]주공, 노지[화덕자리], 작업구덩이, 저장구덩이 등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1호 주거지는 중앙주공만 확인되었지만, 2호와 4호 주거지는 중앙주공과 나란히 2×4열의 내측 주공이 배치되어 주거지 상부 구조가 복잡하고 다양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지는 1호 주거지가 수혈식노지만 2기, 2호와 4호 주거지는 수혈식과 위석식노지가 함께 시설되었다. 주거지 내부는 중앙주공의 배치에 의해 분할되는데, 노지를 중심으로 한 공간[소비공간]과 작업구덩이를 중심으로 한 공간[생산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출토유물은 완과 호의 형태를 띠는 이중구연토기 · 홑구연 구순각목토기 · 구멍무늬토기 등의 토기류와 석부 · 석촉 · 석창 · 석검 · 석착 · 반달형석도 · 어망추 · 지석 · 원판형석기 · 부리형석기 등의 석기류가 있다.
철원 와수리 청동기시대 주거유적은 집자리 구조와 출토유물 양상, 그리고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과 광자극루미네선스[OSL] 측정 결과를 함께 고려해 볼 때 청동기시대 전기인 기원전 11~13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철기시대 주거지는 모두 2기만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남쪽으로 출입구를 낸 철자형으로 청동기시대와 같은 층에서 확인되었고, 모두 화재로 폐기되었다. 주거지의 장축방향은 남-북방향이며, 면적은 약 29~37㎡로 중소형급에 속한다. 노지는 21호 주거지가 수혈식, 26호 주거지는 부석식[점토둑식]이다. 주공은 지름 10㎝ 내외로 벽체를 따라 바닥과 외측에 설치하거나, 내부 일부분에 시설한 것이 확인되었으며, 특히 26호 주거지는 노지의 북쪽 가장자리와 양장벽에 근접하여 중심주공을 설치하였다.
출토유물은 외반구연토기 · 파수부토기 · 시루 등의 경질무문토기류가 있으며, 중국 전국계(戰國系), 또는 한식계(漢式系) 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주조철부 · 철촉 · 철겸 · 철경부동촉 등의 금속류가 있다. 또한 와수리 철기시대 마을의 생업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밭 곡물자료가 확인되었다.
철원 와수리 철기시대 주거유적은 집자리 구조와 토기류 및 금속류의 출토유물 양상을 미루어 볼 때 상한연대는 기원전 2세기 후반, 하한연대는 기원 1세기 중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철원와수리유적은 한탄강 수계의 충적대지상에 유적의 입지와 분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 철원지역의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의 취락구조 및 생업경제 방식, 문화 양상과 변천과정을 살 필 수 있다는 점, 나아가 한반도 중부지역의 청동기시대 및 철기시대의 문화 전파경로와 문화 확산 양상을 구체적으로 추적하는데 보탬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고고유적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