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중랑유적은 당하산(135.2m)의 동쪽 구릉 사면부와 곡간 평지부에 자리한다. 중랑유적에서 확인된 주거지는 모두 205기이며, 조사지역에 인접한 곳에도 수많은 주거지가 분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거지 평면형태는 원형계는 희소하고, 방형계가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점한다. 즉,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 3기를 제외하고는 철기시대 이후로 들어서면서 방형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증가하는 서해안 지역의 일반적인 양상과 일치한다. 주거지 출토유물은 발형토기, 장란형토기, 호형토기, 옹형토기, 완, 시루, 주구토기, 개배, 방추차, 어망추, 박자, 원판형토제품, 원통형토제품, 나팔형토제품 등이 있다. 또한 석촉과 연석 등을 비롯한 석기류와 철겸,철도자,철부,철정 등과 같은 상당수의 철제품들이 출토된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주거지의 연대는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 3기, 철기시대 초기 3기 외에는 대부분 서기 3∼5세기대에 해당하며, 중심시기는 영산강유역에 옹관고분이 발생하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한반도 서남부 일대에서 지역 단위에 기반을 둔 정치체들이 성장하는 시점과도 맞물린다는 점에서 주거지 수가 급증하는 원인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이다. 중랑유적에 위치하였던 취락이 급성장한 주요 원인은 주거지 조사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즉, 21기의 주거지 내부에서 수습된 제철 생산 관련 슬러그편들은 중랑 취락인들이 자체적으로 제철을 가공 처리하였다는 직접적인 근거이다. 함평천의 가장 내륙에 위치한 중랑 취락의 자연적 조건으로 보아 식자원의 생산 배경은 영암 시종이나 나주 반남지역보다는 월등히 낮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제철 관련 생산품이나 기술을 배경으로 대외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중랑 유적이 함평천 일원의 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하였다고 판단된다.
분묘 관련 유구는 청동기시대 지석묘 1기, 철기시대∼삼국시대의 토광묘 3기와 옹관묘 2기, 제형주구(梯形周溝) 1기, 방형주구 1기 등이다. 방형주구에서는 다량의 토기류들이 출토되었는데 이형토기(원통형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원통형토기와 함께 출토된 기종은 단경호, 유공광구소호, 개배, 대옹, 완 등이다. 원통형토기는 주구 전면에서 확인되며, 80여 개체에 달한다. 방형주구의 조영 시기는 6세기 전반대로 추정된다.
지석묘 이후에 분묘가 들어선 시점은 함평천이 포함된 영산강수계에 옹관고분 출현 단계의 분묘들이 조영된 시기이다. 이 시기 영산강유역에는 토광묘와 옹관묘가 혼재된 다장 장법의 분구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서는데, 중랑유적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다. 제형주구가 조영된 당시 중랑 일대 취락은 능선 정상부에 직경 30m 규모의 분구들이 조영되고 아래쪽 사면에는 주거지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무리를 이루는 형태를 띤다. 이는 분구 자체의 상징성이 강조되는 고분 출현 시기에 지형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분묘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지역 수장층의 위엄성을 한층 과시할 수 있는 취락 구조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취락구조는 방형주구가 제형주구의 맞은편 능선에 조영된 6세기전반대에 이르러서도 계속된 것으로 판단된다. 방형주구는 직경 30m에 이르는 대형분구가 중랑 일대에 조영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무렵에 영산강 수계를 무대로 성장한 옹관고분사회 전체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는데, 서남부 각지에 자리하고 있던 지역정치체들이 자체적 성장을 모색하는 시기이다.
중랑마을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주거지, 고분의 주구와 토광묘, 옹관묘, 지석묘 등의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어, 삶과 죽음의 공간이 잘 어우러진 유적이다. 200여동에 이르는 주거지 중 40여동이 화재로 소실된 채 폐기되었으나 화재 주거지에는 각종 유기물들과 가재 도구들이 잿속에 묻힌 까닭에 당시 생활상이 고스란히 남아 고고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받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