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리 고분 묵서명 ( )

고대사
유물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 자리한 고구려시대의 무덤인 덕흥리고분의 앞방 안벽 가운데 윗 부분에 있는 묵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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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 자리한 고구려시대의 무덤인 덕흥리고분의 앞방 안벽 가운데 윗 부분에 있는 묵서명.
개설

덕흥리고분묵서명은 무덤의 앞방 안벽 가운데 윗 부분에 남아 있다. 묵서명의 내용에는 408년(광개토왕 18)에 죽은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낸 진(鎭)의 관직 경력과 무덤 조성과정이 담겨 있다. 진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북한학계의 고구려인설과 한국·중국·일본 학계의 중국인설이 양립해 있다. 5세기대 고구려의 영역 진출 범위와 지방지배체제를 고려할 때 진이 중국에서 고구려로 귀화해 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내용

덕흥리고분묵서명은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 소재한 덕흥리고분의 앞방 안벽 가운데 윗 부분에 14행 154자가 남아 있다. 1976년 관개수로 공사중에 발견되었다.

묵서명 가운데 ‘□□군(□□郡) 신도현(信都縣) 도향(都鄕) [중]감리([中]甘里)’는 무덤의 주인공인 진의 출신지이다. 북한의 연구자들은 신도현(信都縣)을 『고려사』 지리지에 나오는 신도군(信都郡)과 같은 곳으로 보아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에 비정하였다. 이 경우 진은 고구려사람이 된다.

이와 달리 한국·중국·일본의 연구자들은 『진서(晉書)』 지리지에 근거해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안평(安平)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자연 진은 중국인으로서 고구려로 망명한 신분으로 이해하였다. 5세기 초반 고구려의 지방지배가 묵서명처럼 군-현-향-리 단위로 정연하게 이루어졌는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렇다면 진의 출신지는 중국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게 생각된다.

진(鎭)이 역임한 관력 중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은 관등(품계)이고, 그 이하는 관직에 해당한다. 이는 대체로 평생 역임한 순서대로 기재된 것으로 파악된다. 건위장군 외 ‘장군’이 붙은 것은 중국의 군호(軍號)이다. 진이 살았던 동진시대의 건위장군은 4품, 좌장군과 용양장군은 3품이었다. 국소대형은 고구려의 관등인데, 이곳에서만 나온다. 『주서(周書)』에 나오는 고구려의 관등 중에서 대형(大兄)과 소형(小兄)은 각각 3~4등급에 해당하는 고위 관등이다. 국소대형도 이에 준하는 위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진이 중국으로부터 망명해 올 당시 상당한 신분이었으며, 그에 상응하는 품계로 대우했음을 알 수 있다.

요동태수(遼東太守)는 요동군의 장관이다. 사지절(使持節)은 주(州)의 장관이나 장군에게 주는 칭호인데 진은 동이교위(東夷校尉)로서 유주의 장관인 자사(刺史)까지 겸임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의 유주는 지금의 중국 허베이와 산시[山西] 지역을 말한다. 진이 고구려인이라면 4세기 후반 고구려가 베이징[北京] 인근까지 영역지배를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광개토왕(재위 391~402) 대에 이르러 요동지역에 진출하였다. 결국 진의 출신지를 고구려로 보기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진이 역임했다는 관직의 상당수는 실제라기보다는 허구화된 관직이라는 주장도 있다. 곧 진이 중국에서 이주해 온 이후 독자세력을 형성하면서 스스로 자칭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다만 유주 13군 태수가 진에게 하례하는 벽화가 기록화적 성격이 강해 단순한 허직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영락(永樂) 18년 12월 25일은 진을 무덤에 안치한 날이다. ‘영락’은 광개토왕의 연호로서 영락 18년은 408년이다. 진이 영락이라는 고구려의 연호를 채용한 것은 고구려의 지배권 하에 예속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고구려 관등 ‘국소대형’을 받은 것도 이와 부합한다.

의의와 평가

덕흥리고분묵서명은 안악3호분과 더불어 벽화가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 중에서 그 조성시기와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몇 안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덤 주인공인 진의 출신지에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중국인 망명객으로서 파악한다면 고구려의 이들에 대한 처우 및 활용, 나아가 이 지역 지배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참고문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고구려·백제·낙랑 편』(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덕흥리고구려벽화무덤』(박진욱 외,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
「고구려는 정말 유주를 지배했는가-유주자사 진묘지」(전호태, 『고대로부터의 통신』, 푸른역사, 2003)
「덕흥리벽화고분의 주인공과 그 성격」(공석구, 『백제연구』 21, 1990)
「德興里壁畫古墳の被葬者の出自と經歷」(武田幸男, 『朝鮮學報』 130, 1989)
「德興里高句麗壁畫古墳の墓誌」(佐伯有淸, 『日本古代中世史論考』, 吉川弘文館,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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