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가 쌓은 거점성이다. 550년에 삼국 간 각축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위치는 세종시 전의면과 전동면 일대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금현성은 애초에 백제가 쌓았다. 그런데 550년 3월에 고구려가 금현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신라 진흥왕이 백제와 고구려 군사의 피로한 틈을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령해 금현성과 도살성을 빼앗고 그곳에 갑사(甲士) 1천 명을 주둔시켰다고 되어 있다.
금현성의 위치는 충북 진천이 고구려의 금물노현(今勿奴郡)이었던 데 착안해 진천 서쪽으로 비정하기도 했지만, 음운상의 유사성만이 고려된 것이어서 설득력이 약하다. 최근 들어 주목받고 있는 곳이 세종시 전의면과 전동면에 소재한 금성산(金城山) 일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의현 산천 및 고적조에 따르면, ‘전의현(全義縣) 남쪽 8리에 있는 금성산(金城山)에 돌로 쌓은 옛 성이 남아 있다’고 했고, 또 ‘현 남쪽 7리에 있는 운주현(雲住山)에 돌로 쌓은 금이성(金伊城)이 있었다 ’고 한다. 지금도 ‘금이고개’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하므로 이곳을 금현성의 위치로 비정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금현성을 둘러싼 삼국 간 공방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을 볼 때 6세기 중반 미호천 유역의 영유권이 유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신라가 두 성을 차지했으므로, 6세기 전반까지 대전과 청주 동쪽 방면에 머물러 있던 신라가 청주 서북쪽의 미호천 유역까지 진출했던 정황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