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오리산성의 남문 안쪽 동북 100m 지점의 큰바위의 다듬어진 면에 1행 7자, 2행 8자, 3행 7자 모두 3행 22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57년에 발견되어 1958년 9월에 신의주 역사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명문가운데 축성 책임자 어구루의 소속 부인 전부(前部)는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전과 『한원(翰苑)』에 따르면, 고구려의 5부 중에서 남부(南部) 곧 관노부(灌奴部)이다.
어구루의 관등(官等)인 소대사자(小大使者)는 사자(使者)에서 분화된 관등임이 유력하다. 사자는 왕이나 대가(大加)의 밑에 두었던 하급 행정 실무직인데 주로 조세의 수취를 담당하였다. 그 역할이 중시됨에 따라 태대사자(太大使者)‧대사자(大使者)‧소사자(小使者)‧상위사자(上位使者)‧발위사자(拔位使者) 등으로 기능이 분화되었다. 소대사자는 이곳에만 그 용례가 나온다. 이를 대사자의 별칭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소사자의 별칭으로 보기도 한다. 대사자는 고구려의 12관등 중 『주서(周書)』에는 8등으로, 『한원』에는 6등으로 나온다. 소사자는 『주서』에 9등으로 나온다.
농오리산성의 성벽 둘레는 2,020m이다. 여기에 684칸을 대입하면, 1칸의 길이는 약 295cm 정도가 된다.
산성의 축조연대를 알려주는 ‘을해년(乙亥年)’에 대해서는 북한학계에서 먼저 유리왕 34년(15)설을 제기하였다. 농오리산성이 대령강 이남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쌓은 것인데, 고구려가 태조왕 4년(56)에서야 청천강에 이르렀으므로 그 이전에 대령강 일대를 영유했을 것이라는 정황논리가 그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3세기 중반 이전의 사실을 전하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는 분화되기 이전의 사자(使者)만이 나온다. 이는 산성의 축조연대가 아무리 빨라도 3세기 중반 이후임을 시사한다. 때문에 ‘을해년’에 대한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는 435년(장수왕 22), 495년(문자명왕 4), 555년(양원왕 10)으로 나뉘어진다. 특히 서체(書體) 상으로 볼 때 5세기 중·후반에 건립된 「충주고구려비」보다는 해서(楷書)의 기본획이 많고, 평양성의 병술명(丙戌銘, 566년) 석각보다는 해서의 기본획이 적으므로 농오리산성의 축조는 그 사이에 해당한다고 본 견해가 주목된다. 그렇다면 495년과 555년설이 좀 더 유력하게 보인다.
농오리산성 마애석각은 산성의 축성연대는 물론 축성 책임자의 소속과 관직·이름까지 알려주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축성연대에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현존하는 고구려 축성 관련 금석문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