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지마이사금 때 쌓은 산성이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로 위치 비정이 가능하다. 금관가야와 왜국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증산성은 121년(지마이사금 10) 2월에 신라가 쌓은 산성이다. 『삼국사지』 지리지 양주(良州)에 따르면, 대증현(大甑縣)은 동래군(東萊郡)의 속현으로서 동평현(東平縣)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속현조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곧 대증산성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 소재한 것으로 비정된다. 김정호도 『대동지지(大東地志)』 동래 성지조에서 동평고현성(東平古縣城)이 지마왕 10년에 쌓은 대증산성임을 주장하였다. 김정호는 당시 산성이 동남쪽은 돌로 쌓았고 서북쪽은 흙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둘레는 3508척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거도(居道)전에 따르면, 동래군은 원래 거칠산국(居柒山國)이라는 소국으로 존재하다가 탈해이사금 때 신라에 복속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대증산성이 축성된 시기를 전후한 기록을 살펴보면, 가야[금관가야]와 왜(倭)가 신라의 남쪽 변경을 지속적으로 쳐들어옴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대증산성은 이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방어성으로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신라의 거칠산국 복속과 대증산성 축조시기를 『삼국사기』 보다 늦추어보는 견해도 있다. 곧 동래 복천동 고분군이 4~5세기를 중심 연대로 하여 존재했으므로, 신라가 2세기 초반에 이 지역을 복속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대체로 4세기대 이후의 후대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