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3년명동종은 1920년에 평양 선교리 선교역 동북방 수안가도 부근에서 선로공사 도중 발견되었다. 나무곽 안에 있었던 2개의 나무관 남쪽에서 청동솥 등과 함께 출토되었다. 종의 형태는 일반적인 모습이며, 종의 몸체 상·중·하 3곳과 종의 입구인 구연 부분에 띠선(帶條線)이 있다. 발견 당시 종 아래의 다리 부분이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종의 크기는 입구 지름이 19㎝, 둘레가 34㎝, 높이 37.5㎝(파손 전 45㎝)이다. 종의 몸체에 예서체로 된 3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영광(永光)은 전한 원제(元帝, 기원전 49~33)의 연호이다. 종의 제작연대인 영광 3년은 기원전 41년이다. 이 종이 출토됨에 따라 효문제의 사당이 낙랑 지역에 있었는 지의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정인보는 효문제가 낙랑에 순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당의 존재를 부정했고,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등 일본인 학자들은 사당의 존재를 낙랑군의 위치와 관련지어 인정하였다.
『한서(漢書)』 권73, 위현전(韋賢傳)에 따르면, 한 고조의 태조묘(太祖廟)와 효문제의 태종묘(太宗廟), 그리고 무제(武帝)의 세종묘(世宗廟)는 전국 군국(郡國)에 모두 합쳐 167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효문제가 순행한 일이 없는 요동의 어양군(漁陽郡)에서도 효문제의 사당이 있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시루가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평양 지역의 낙랑군에서도 효문제의 사당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