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 3호분 묵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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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자리한 고구려시대의 무덤인 안악3호분의 앞방 서벽 왼쪽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있는 묵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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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자리한 고구려시대의 무덤인 안악3호분의 앞방 서벽 왼쪽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있는 묵서명.
개설

안악3호분묵서명은 무덤의 앞방 서벽 왼쪽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남아 있다. 묵서명의 내용은 336년에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에 불만을 품고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가 357년에 죽을 때까지 지낸 관직을 나열한 것이다. 동수가 무덤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고구려왕[미천왕·고국원왕]이 무덤의 주인공인지를 두고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내용

안악3호분묵서명은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구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에 소재한 안악3호분 무덤의 앞방 서벽 왼쪽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7행 68자가 남아 있다. 1949년에 발견되었다.

묵서명 가운데 ‘영화(永和)’는 동진(東晉) 목제(穆帝, 재위 344361)의 연호이다. 묵서명의 주인인 동수가 사망한 날인 영화 3년은 357년(고국원왕 27)이다. ‘ 영화’ 연호는 345356년까지 12년 동안 사용하다가 357년 정월에 새로운 연호 ‘승평(升平)’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연호를 바꾼 지 10개월이 지난 시점까지 동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셈이다.

사지절(使持節)~도향후(都鄕侯)는 동수가 지낸 관직과 관작이다. 사지절은 지휘관의 권한을 규정한 것이고, 도독제군사는 한 지역의 군사를 통솔하는 자이다. 일반적으로 도독제군사는 ‘도독(지역)제군사’ 형식으로 군사적 권한 지역이 표기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평동장군은 장군호로서 진(晉)대의 3품 관등에 해당한다.

호무위교위는 주변 이민족의 감시·통제를 위해 설치한 관직인 것 같은데, 다른 곳에서 용례가 나오지 않아 구체적인 직임을 살피기 어렵다.

낙랑상에서의 ‘상(相)’은 일정한 왕국의 장관이다. 중국에서는 군(郡) 규모 정도의 왕국을 관할하는 장관을 289년 이전에는 ‘상’이라 했고, 그 이후에는 내사(內史)로 바꾸어 불렀다. 그렇다면 357년 당시 낙랑상이란 표기 역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도향후는 후한의 20등급 작위에서 가장 높은 열후(列侯)의 하나이다. 열후는 세금을 거두는 식읍(食邑)이 현(縣)·향(鄕)·정(亭)이냐에 따라 현후·향후·정후로 나누었는데, 도향후는 현후와 향후 사이에 해당한다.

동수의 출신지인 요동군 평곽현은 오늘날의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가이핑[蓋平]이다. 묘지명의 주인공인 동수(冬壽)는 336년에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에 불만을 품고 고구려에 귀화한 동수(佟壽)와 같은 인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수가 역임한 관직의 용례가 당시 중국의 것과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이러한 관직들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동수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높이기 위해 자칭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묵서명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무덤의 주인공을 동수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물, 곧 고구려왕으로 볼 것인지의 여부였다. 일찍이 북한학계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고구려왕으로 보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었다. 1970년대까지는 미천왕릉설이 우세했고, 그 이후에는 고국원왕릉설이 통설로 자리잡았다. 미천왕릉설을 주장한 학자로는 전주농·주영헌 등이 있고, 고국원왕설은 박진욱·손영종 등이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 배경에는 4세기 중엽까지 황해도 안악지방이 중국 망명객이 차지할 정도로 고구려의 세력이 못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당위적 측면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국내성 시기 국왕의 묘가 안악지방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남한학계에서는 김원룡·김정배에 의해 동수설이 제기된 이후 공석구에 의해 발전적으로 논의가 진전되어 현재 통설로 자리매김하였다. 다만 무덤 주인공의 묵서명이 왜 주인의 초상이 있는 방이 아닌 앞방 서벽 왼쪽 장하독의 그림 위에 그려졌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또한 왕을 뜻하는 ‘성상번(聖上幡)’이 무덤의 회랑 벽화에 나오는 점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의의와 평가

안악3호분묵서명은 덕흥리고분 묵서명과 더불어 벽화가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 중에서 그 조성시기와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몇 안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덤 주인공의 실체에 따라서 고구려가 안악지방을 언제 어떻게 차지하고 영역지배했는지도 규명할 수 있다.

참고문헌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고구려·백제·낙랑 편』(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역사의 블랙홀, 동수묘지」(전호태, 『고대로부터의 통신』,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푸른역사, 2003)
「안악 3호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박진욱, 『조선고고연구』 1990-2, 1990)
「안악 3호분의 묵서명에 대한 고찰」(공석구, 『역사학보』 121, 1989)
「안악 제3호 무덤의 피장자에 대하여」(주영헌, 『고고민속』 1963-2, 1963)
「다시 한번 안악의 왕릉을 론함」(전주농, 『고고민속』 1963-2, 1963)
「안악 하무덤(3호분)에 대하여」(전주농, 『문화유산』 1959-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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