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사량부 민간인 출신이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자태와 용모가 복사꽃처럼 화사하다고 해서 '도화랑'으로 불리웠다. 당시 임금이었던 진지왕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없으면 어떠하겠느냐는 진지왕의 물음에는 상관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발언을 통해 당시 신라사회에서 정조에 대한 관념은 있었지만 재혼에 대한 금기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진지왕은 왕위에서 쫒겨나고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도화랑의 남편이 죽은 뒤 혼령으로 나타나 7일 동안 머물다가 떠났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아들 비형랑을 낳았는데, 제 26대 진평왕이 신이함을 듣고 비형랑을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웠으며 15세가 되자 집사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설화적인 형태로 남아 있는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진평왕 즉위 초기에 사륜계 일부세력이 협조하거나 묵인했던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도화랑의 실체에 대해서는 진지왕비인 지도부인(知道夫人)과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