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제 (·)

고대사
제도
삼국시대 백제에서 각 지역에 왕(王)과 후(侯)를 임명하여 지방을 통제하던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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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백제에서 각 지역에 왕(王)과 후(侯)를 임명하여 지방을 통제하던 제도.
개설

『위서(魏書)』·『남제서(南齊書)』의 백제전(百濟傳)에만 관련사료가 남아 있어 5세기를 중심으로 실시된 제도라고 생각된다.

내용

백제에서 왕과 후가 임명된 것은 모두 3회이다. 첫번째는 472년(개로왕 18) 북위(北魏)에 사신으로 파견한 여례(餘禮)인데, 불사후(弗斯侯)였다. 두번째는 490년(동성왕 12)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동성왕(東城王)이 신하들의 관작을 임명한 사례인데,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을 도한왕(都漢王)으로,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를 아착왕(阿錯王)으로, 여력(餘歷)을 매로왕(邁盧王)으로, 여고(餘固)를 불사후로 임명하였다. 세번째는 495년(동성왕 17)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동성왕이 신하들의 관작을 임명한 사례인데, 사법명(沙法名)을 매라왕(邁羅王)으로, 찬수류(贊首流)를 벽중왕(辟中王)으로, 해례곤(解禮昆)을 불중후(弗中侯)로, 목간나(木干那)를 면중후(面中侯)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는 점은 4가지가 있다. 첫째, 왕과 후에 임명된 자는 왕족과 귀족만 보이고, 5세기에 외교에서 활약하던 한인계(漢人系)가 보이지 않아서 임명대상에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490년까지는 왕족이 중심이었지만 495년에는 귀족이 중심이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백제 내부의 지배세력 교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셋째, 같은 지명에 서로 다른 사람이 임명되거나 서로 다른 작호가 존재하는 경우가 있었다. 넷째,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작호와 관칭되는 지명이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셋째, 넷째의 경우 중국의 봉작제가 세습되는 것과는 달리 세습이 인정되지 않고 생전에도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 주목된다.

왕과 후 앞에 붙은 지명은 왕과 후가 임명된 지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체로 전라도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왕과 후가 임명되는 지역이 수도와 가까운 기존의 중심지가 아니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개척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495년에 임명된 왕과 후를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으나, 성씨가 대성팔족(大姓八族)에 해당하므로 중앙귀족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왕후제에 대해서는 파견을 전제로 하여 그 자체가 지방통치제도인 것으로 인식하거나 담로제(檐魯制)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왕과 후는 기본적으로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왕을 대신해 해당 지역을 통치하고 중앙정부를 통해 대가를 받는 지방관보다는 공로의 대가를 해당 지역에서 정기적이고 일정한 수확물로 직접 받을 수 있는 식읍(食邑)과 유사한 것이었다. 또 현지 파견을 증명할 만한 자료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지에 직접 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해당 지방을 통제하면서 일정한 수확물을 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위와 같은 견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왕후제가 백제에서 지방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다. 그 통제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왕권에 대한 평가 등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변천과 현황

6세기 이후로는 왕과 후가 임명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던 태수(太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최근 고창군 흥덕면 오호리에서 6세기 전반의 장군호(將軍號)가 새겨진 청동 인장(印章)이 출토된 사례로 볼 때, 왕·후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던 장군호가 6세기에도 존속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왕과 후도 6세기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의의와 평가

왕후제는 백제의 특징적인 지방통치제도로 알려진 오방제(五方制)가 실시되기 이전에 지방을 통제하는 방법으로서 이용된 것이었다. 왕과 후의 파견 여부, 담로제와의 일치 여부 등 아직 논쟁할 요소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백제의 지방통치제도가 발전해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빠뜨릴 수 없는 요소라는 점은 분명할 것이다.

참고문헌

『동아시아 속의 백제 정치제도』(정동준, 일지사, 2013)
『古代東アジアの日本と朝鮮』(坂元義種, 吉川弘文館, 1978)
「백제의 식읍제에 대한 일고찰」(노중국, 『경북사학』 23, 2000)
「웅진시대 백제의 영역재편과 왕·후제」(田中俊明,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97)
「백제 지방통치체제 연구」(김영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웅진·사비시대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정재윤, 『한국상고사학보』 10, 1992)
「5세기 백제의 「왕」·「후」·「태수」제에 대하여」(양기석, 『사학연구』 38,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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