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평회의 ()

고대사
제도
삼국시대 백제에서 좌평(佐平)들이 모여 정무를 논의하던 회의.
이칭
이칭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
정의
삼국시대 백제에서 좌평(佐平)들이 모여 정무를 논의하던 회의.
개설

백제의 최고 관등인 좌평들이 모여 정무를 논의하였기 때문에 최고의사결정기구의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내용

정사암회의라고도 하는데, 정사암(政事巖)은 사비시대(泗沘時代)의 회의장소 명칭이므로 웅진시대 이전에는 사용하기에 곤란하다. 최초로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최초로 동시에 3명의 좌평이 임명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전지왕대(405∼420)일 가능성이 높다.

회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하는 사료로는 『삼국유사』 남부여·전백제조가 있다. 그에 따르면, 좌평을 선임할 때에는 후보자 3~4인 중 1인을 선출한다고 하는데, 귀족들의 합의제적 전통이 남아 있는 모습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또 왕이 좌평의 인사에는 함부로 개입하지 못하고 사후 승인만 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회의의 구성원은 좌평 관등 소지자인데, 5세기에는 3명이었다가 6세기에는 5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참여하는 인원의 증가는 좌평 간의 담합을 방지하고 좌평 1인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정도를 줄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백제의 회의체에 대해서는 주로 제솔회의(諸率會議)가 강조되어 왔으나, 그것은 좌평회의보다 참가자 수가 많고 폭넓은 의사 수렴을 위한 것이어서 비상시에 중대한 일을 결정하는 전체회의적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일상적인 정무를 처리하기에는 부적절하므로 소수의 인원이 빈번하게 모여서 결정할 수 있는 좌평회의와 같은 형태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변천과 현황

657년(의자왕 17) 왕서자 41명이 좌평에 임명되는 사례에서 보듯, 7세기가 되면 3∼5명이던 좌평의 정원이 없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 결과, 특정 직무를 담당하는 6좌평과 상좌평, 그리고 특정 직무가 없는 무임소의 좌평이 구별되어 후자는 회의에 참여하더라도 발언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에 따라 좌평회의도 6좌평과 상좌평 중심으로 재편되어 왕권과 대립하는 귀족회의의 성격보다는 행정상의 최고회의로서 '재상회의'와 같은 관료적 성격이 강해졌다고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좌평회의가 합의제적 전통의 귀족회의에서 행정상의 최고회의로서 관료적 성격이 강해져가는 모습을 통해 고대 정치의 발전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동아시아 속의 백제 정치제도』(정동준, 일지사, 2013)
『백제정치사연구』(노중국, 일조각, 1988)
「백제 사비시대 정치사 연구」(김주성, 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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