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엽사는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를 중심으로 농장을 경영하고자 하였다. 옥구군(현, 군산시) 서수면을 일본 니가타현(新潟県) 북포원군(北蒲原郡)의 모형에 따라 일본화할 것을 추진한 가와사키(川岐)농장의 이념을 계승하였다.
1910년대 초 시로세 슌조우 등 니가타현 출신 지주자본가들은 합명회사 형태로 이엽사를 설립하였다. 본점은 니가타에, 지점은 전주 청수정에 두고 전라북도를 중심으로 농장을 경영하였다. 1920년 주식회사로 조직을 변경하고 새로운 출자자를 모집한 결과 자본금이 20만원에서 200만원(불입 90만원)으로 증가하였다. 소유 토지가 각지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전주부 · 삼례부 · 서수부 · 황등부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서수부는 1926년 가와사키농장을 매입하여 규모가 확대되었고, 이후 이엽사의 사무소도 전주에서 서수면으로 이전하였다.
1927년 무렵에는 전주의 삼례농장, 익산의 황등농장, 옥구의 서수농장 등 3개의 농장을 소유하였다. 이들 농장은 1200정보의 토지를 약 1700명의 조선인 소작인에게 경작시켰다. 이엽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식 추구에만 급급하여 전제적인 소작경영방식을 구사하였다. 그 결과 1927년 75%라는 살인적인 소작료를 징수하여 옥구농민조합이 서수농장을 상대로 장기적이고 대규모적인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는 농민들에게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다.
이엽사는 조선에서 토지에 투자한 농업회사로서,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에 대한 일본 자본가의 대응방식을 보여준다. 토지의 매입과 고율의 소작료는 조선인들에게 원성의 대상이었고, 결국 장기간에 걸친 소작쟁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