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집 ()

불교
개념
붓다의 입멸 후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개최한 불교집회. 합송 · 상기티(saṃgīti).
이칭
이칭
합송(合誦), 상기티(saṃgī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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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결집은 붓다의 입멸 후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개최한 불교 집회이다. 합송(合誦), 상기티(sa?g?ti)라고도 한다. 결집은 부처 말씀의 진위 문제를 해결하고 불설을 후세에 바르게 전승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최초의 결집은 붓다의 입멸 직후 개최되었다. 아난다가 경을 암송하면 모두 따라 합송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의 결집이 이어졌다. 결집은 붓다의 입멸 후 그의 가르침이 왜곡되거나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한 출가 승려의 노력이다. 고려시대 고려대장경 간행도 일종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
붓다의 입멸 후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개최한 불교집회. 합송 · 상기티(saṃgīti).
개설

결집(結集)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상기티(saṃgīti)는 합송(合誦)을 의미한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붓다의 가르침을 함께 읊어 냄으로써 붓다의 말씀을 정리한 것이다. 붓다가 입멸하자 그의 가르침을 바르게 보존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출가 수행자가 모여 결집을 진행하였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불설(佛說)의 진위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불설을 확립하여 후세에 바르게 전승시키려는 시도였다. 붓다의 입멸 직후 이루어진 제1결집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에 걸쳐 결집이 이루어져 왔다.

연원 및 변천

제1결집(서기전 5세기)은 불교 전승에 의하면 붓다의 입멸 직후 개최되었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Ajātasattu) 왕의 후원에 힘입어 왕사성(王舍城)〔현재 라즈기르(Rajgir)〕 칠엽굴(Sattapanni)에서 마하캇사파(Mahākassapa)〔대가섭(大迦葉)〕이 주도하였다. 재세시 붓다가 가르친 경(經, sutta)과 율(律, Vinaya)을 불설(佛說, Buddhavacana)로 확정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500여 명의 아라한이 결집에 참여하였는데, 경(經)은 아난다(Ānanda)에 의해, 그리고 율(律)은 우팔리(Upāli)에 의해 송출되었다.

아난다가 먼저 암송하면 모두 따라 합송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문헌에 의하면 논장(論藏)도 송출되었다고 한다. 결집 내용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그 당시 일부 승려는 결집 내용에 만족하지 않았다. 전승에 의하면 비구 아라한 500명이 모여 결집하였으므로 오백결집이라고 한다. 칠엽굴에서 이루어진 결집에 참여하지 못한 비구들은 따로 한곳에 모여 굴외결집(窟外結集)을 개최하였다고 전한다.

제2결집(서기전 4세기)에 관한 내용은 주로 율장에 전해져 오고 있다. 불멸 후 100년경 베살리(Vesālī) 지역의 승려가 돈을 받는 것을 계기로 율에 관한 분쟁이 일어나고 그 해결 과정에서 제2결집이 개최되었다. 700명의 승려가 결집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700결집이라고도 한다. 상좌부(上座部, Theravada)는 금은 등을 보시로 받는 행위 등 10가지 항목을 '불법(佛法)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데 비해 대중부(大衆部, Mahāsanghika)는 '불법'이라고 주장하여 분열이 되었다. 상좌부에 불복한 대중부의 비구들이 모여 독자적인 결집을 열었다. 이 결집을 계기로 통일되어 있던 불교 교단은 분열하게 된다.

제3결집(서기전 251년)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차이가 나지만, 상좌부(Theravāda) 문헌에 의하면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Aśoka) 왕에 의해 성립되었다. 아쇼카왕 즉위 17년,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āṭaliputra)〔화씨성(華氏城), 현재 파트나(Patna)〕에서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제3결집은 이설(異說)로부터 불교를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 행하였으며, 붓다의 가르침을 분별설(分別說)이라고 주장하는 승려는 불제자로 인정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승려는 추방하였다.

이 결집 과정에서 논서인 『논사(論事, Kathāvatthu)』가 저술되었고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제3결집에서는 논서들을 논장(論藏)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삼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삼장을 편찬하는 데는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상좌부에서 분파된 일부파)의 문헌에 의하면 아소카왕 때 대중부가 아라한에 대한 5가지 결점을 주장하는 것을 계기로 분쟁이 일어나고, 그 해결 과정에서 결집이 일어났다.

제4결집(서기전 1세기)은 스리랑카의 알루 비하라(Alu Vihara)에서 밧타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aya) 왕 시절에 이루어졌다. 상좌부와 대승불교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결집이 이루어졌다. 이 결집에서 처음으로 상좌부는 불교 경전을 문자화하였다고 전한다. 모든 팔리어 삼장이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하지만 그 정확한 문헌의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설일체유부의 전승에 의하면 쿠샨 왕조의 카니쉬카(Kanishka, 재위 73~103년)왕에 의해 서기후 78년에 카슈미르(Kaśmī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제4결집이 이루어졌다. 파르슈바(Pārśvā)〔협존자(脇尊者)〕와 바수미트라(Vasumitra)〔세우존자(世友尊者)〕 등이 카니슈카 왕의 후원을 받아, 삼장에 정통한 500명의 승려가 모여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등 설일체유부 논서를 12년에 걸쳐 결집하였다고 한다.

현황

상좌부는 제5결집을 1871년에 민돈(Mindon) 왕의 후원으로 미얀마(Myanmar)에서 개최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이 조금이라도 변형되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결집이 이루어졌다. 결집 결과 삼장 전체를 729장의 대리석에 새겼다. 이 결집은 미얀마에서만 인정되고 있다. 제6결집이 1954년 양곤(Yangon)에서 개최되어 2년간 진행되었다. 스리랑카 등 8개국 출신의 상좌부 승려 2,500명이 모여 결집을 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태국 등 대형 사찰에선 팔리어 삼장을 다시 정리하고 전산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결집은 출가 승려에 의해 주도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비구니나 재가자를 위한 붓다의 가르침이 모두 결집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비구 중심으로 붓다의 가르침이 정리된 셈이므로 비구니나 재가자에게 부처님이 가르친 말씀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결집이 역사적으로 실제 개최되었는가 하는 논의가 불교학계에서 이루어져 왔다.

붓다의 입멸 후 붓다의 가르침이 왜곡되거나 소실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승려들이 경전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결집의 개최로 평가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고려대장경 간행도 일종의 결집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인도불교사』(에띠엔 라모뜨, 호진 옮김, 시공사, 2006)
History of Indian Buddhism(E. Lamotte, Paris: Peeters Press, 1976)
A Review of Scholarship on the Buddhist Councils(Charles S. Prebish, Journal of Asian Studies 33-2, 1974)
위키피디아(en.wikipedia.org/wiki/Buddhist_counc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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