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습(薰習)은 산스크리트어의 ‘바사나(vāsanā)’를 한역한 것으로 티베트어로는 ‘박착(bag chags)’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바사나’는 어떤 냄새가 배는 것을 뜻하는데, 불교에서 전 · 후생을 오가는 업(業, karman)을 설명하면서 체계화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바사나는 일반적으로 ‘냄새가 옷에 밴다’, ‘꽃을 만진 손에는 꽃향기가 마늘을 만진 손에는 마늘 냄새가 밴다.’ 등의 비유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훈습을 뜻하는 ‘바사나’를 맨 처음 도입하여 업의 이론을 체계화한 부파는 소승 유부의 자부파인 경량부(經量部)였다.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색(色)이 마음[心]에 작용하여 그 결과물을 남길 것이라는 소박한 발상에서 시작된 이 훈습 개념은 이후 제 팔식(第八識)인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sarva bīja vijnāna)을 뜻하는 ‘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을 통해 윤회를 설명하는 대승 유식사상과 결합하면서 체계화된 이론으로 발달하였다.
『섭대승론』과 『성유식론』에서는 이 훈습을 소훈(所薰)과 능훈(能薰)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섭대승론』에서는 소훈이 가져야 할 네 가지 조건으로 견주성(堅住性), 무기성(無記性), 가훈성(可熏性), 상응성(相應性)을 제시하였다.
이 중 첫째인 견주성이란 상속되면서 이어져 생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훈이기 위해서는 훈습된 습기(習氣)를 지닌 채 그 습기를 다시 산출해 낼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습기를 지니고 유지하는 것은 견주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참깨와 같이 단단하고 고정적인 것은 견주성을 가진 것이다. 이에 반해 바람이나 소리 등은 견주성을 갖지 않는다.
다음으로 무기성이란 평등성, 중성을 의미한다. 소훈 자신의 개성이 너무 강렬하면 훈습이 될 수 없다. 가령 사향이나 마늘과 같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자체가 강렬한 향을 내뿜는 것들은 자체의 향이 다른 향을 압도하기 때문에 다른 향을 입힐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소훈은 선과 악이라는 어느 한 쪽이 아닌 무기(無記)여야 한다.
셋째로 가훈성이란 소훈은 능훈과 부분적으로 섞여 화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훈이기 위해서는 능훈의 습기를 자신 안에 받아 들이는 방식으로 능훈과 부분적으로 융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훈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금석(金石)을 들 수 있다.
넷째로 상응성이란 소훈과 능훈의 상응으로, 소훈과 능훈이 같은 시공간에서 붙어 있지도 떨어져 있지도 않은 상태, 즉 부즉불리(不卽不離)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유식론』에서는 『섭대승론』에서 제시한 소훈의 네 가지 조건에 더하여 능훈의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능훈의 네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능훈은 생멸(生滅)해야 한다는 것이다. 능훈이기 위해서는 생멸 변이를 통해 습기가 점점 더 자라도록 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둘째, 능훈은 뛰어난 작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능훈은 강한 힘으로 습기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능훈에는 증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줄기도 하고 늘기도 하면서 습기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능훈은 소훈과 상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훈의 4의(義) 중 네 번째인 상응성과 동일하다.
이와 같이 『섭대승론』과 『성유식론』에서는 소훈과 능훈이 가져야 할 네 가지 조건을 열거한 후,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은 아뢰야식뿐이므로 아뢰야식만이 소훈, 그리고 능훈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동아시아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인도 불교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훈습론을 전개하였다.
『대승기신론』의 「제3 해석분(解釋分)」에는 어리석음, 즉 무명(無明)에서 발생한 훈습의 다양한 종류가 정리되어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먼저 훈습을 진(眞)과 망(妄), 즉 진실된 것[眞]인 정법훈습(淨法熏習)과 그릇된 것[忘]을 뜻하는 염법훈습(染法熏習)으로 나눈다. 그리고 염법훈습을 다시 무명훈습(無明熏習), 망심훈습(妄心熏習), 망경계훈습(妄境界熏習) 등 3종으로 나눈다. 이와 같이 『대승기신론』에는 정법훈습과 3종의 염법훈습이라는 총 4종의 훈습, 즉 사훈습(四熏習)이 등장한다.
정법훈습은 진여(眞如)가 무명을 이겨 훈습하는 것이고, 염법훈습은 무명이 진여를 이겨 발생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훈습인 무명훈습으로 인해 그릇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망심훈습이고 이 마음 때문에 인식 대상마저 그릇되게 파악하는 것이 망경계훈습이다.
불교 문화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민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버릇, 습관 등을 설명할 때 ‘습(習)이 들었다’, ‘나쁜 물이 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불교 용어가 일상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습관을 설명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이 널리 사용되는 것은 곧 불교의 업과 윤회 이론이 한국 문화에 내재화되었음을 반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