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에 참여하였고,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간부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4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었으며, 1943년 1월 20일 한국독립당 한국청년회의 예술간사,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 내무부 경무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등에서 활동하였다.
박영준은 부친의 희망에 따라 1939년 2월 광시성〔廣西省〕 유주(柳州)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에 참여하여 항일 연극과 강연, 합창 및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 사상 고취와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유주 각계의 지지와 중국 항전 예술단체의 협조하에 삼일절 기념공연과 중국 부상병을 위한 위로금 모금공연 등을 전개하였다. 청년공작대의 항일 공연예술 활동은 중국 측에 한 · 중 연대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인식하게 하였고, 한국 고유의 정서와 특색을 담긴 공연을 선보여 중국인 관객들 앞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내 보였다.
193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재 양성 계획에 따라 중국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여 1941년 12월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7로 졸업하였다.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제되었고, 1942년 4월 상위(上尉) 직급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었다.
1943년 1월 20일 한국독립당 청년들이 청년 상호 간의 친목과 수양을 목표로 창립한 한국청년회의 예술간사로 선임되었고, 1943년 3월 15일에는 한국독립당의 5개 구(區) 중 24명으로 구성된 제3구에 속하였는데 주회(周回)는 매주 금요일 19시였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9일 한국국민당 · 재건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되어 창당되었다.
1943년 6월 29일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理財科) 과장(科長)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8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 12월 12일 임시정부 강당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신순호(申順浩)와 혼인하였다. 1944년 6월 1일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 과장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6월 12일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警務科) 과원(科員)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3월부터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8월에는 개봉지구(開封地區) 특파단 단장으로 파견되어 한인 청년 300여 명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등 광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45년 11월 1일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의 동북 총판사처(總辦事處) 외무주임으로 한인들에 대한 조사, 구호, 재산처리, 귀환 등의 활동을 펼치고 1948년 4월에 귀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