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희(安英姬)는 1925년 1월 4일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 용정리(龍井里)에서 안학봉(安學鳳)과 홍학실(洪學實)의 딸로 태어났다.
1940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가입하여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 한국청년훈련반을 졸업하였다.
1939년 10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한 · 중 연합으로 일본군과 전투하기 위해 결성 직후 중국군 제10전구(戰區) 사령부가 있는 산시성 시안으로 이동하였고, 중국군 제34집단군 호종남(胡宗南) 사령관과 교섭하여 1940년 3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신설하여 4월부터 훈련을 시작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주된 활동은 중국 항전에 대한 협조 외에 초모(招募) 활동이었다.
한국청년훈련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을 전방으로 파견하기 전에 재교육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한국청년훈련반 제1기 훈련은 1940년 7월에 종료되었고, 1942년 10월경까지 제2기와 제3기 90여 명이 훈련을 받았는데, 1940년 11월 1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성립 1주년 기념사진에서 안영희를 찾을 수 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대표적인 활동은 연극 등 선전 활동으로 중국인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많은 공연을 하였고, 공연 수입은 중국 병사들의 동복과 하복 준비, 어린이들을 위한 비용으로 희사하였다. 중국과 한국의 이해 증진을 목적으로 기관지 『한국청년』을 1940년 6월 제1권 제1기부터 1941년 9월 1일 제4기까지 발행하였다.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團拜式)이 끝난 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시안의 본부에서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고, 안영희는 제5지대 의무실에서 군의관 최동인(崔東仁)과 함께 한국광복군 부상병과 그 가족을 간호하였다. 1942년 3월 1일 3 · 1절 기념식 후 제5지대 본부에서 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이 동료 대원들에게 살해되었다.
암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만인 1942년 4월 1일 제5지대는 기존의 제1, 2지대와 통합하면서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이때 안영희는 제2지대 의무실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8 · 15광복 이후 상하이에 머물다가 1946년 6월 총사령부에서 한국광복군 해체령을 내리자 6월 3일 귀국하였다. 1953년 2월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숙명여대에서 강의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