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은 비합법 사회주의 조직으로 1989년 11월에 결성되었다. 사노맹의 전신은 ‘제헌의회그룹’과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이다.
1980년 5월경 결성된 제헌의회그룹은 당시 직선제 개헌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NL진영[민족해방파]과 대립하여 ‘파쇼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내세웠다. 이 조직은 1986년 11월경부터 1987년 1월에 이르는 시기에 대대적인 검거를 맞아 조직적으로 붕괴하였다.
이후 제1차 제헌의회 조직의 중간 지도부가 1987년 중반에 조직을 재건하여 제2차 제헌의회그룹의 지도부로 부상하였으며, 그들은 조직명을 노동자해방투쟁동맹으로 명명하였다. 1987년 대선 시기에 백기완을 대통령 후보로 하는 독자 후보 전술을 전개하였다.
노해동의 지도부는 1987년 12월의 대선과 1988년 4월의 13대 총선 과정에서 당면 정세와 전략 · 전술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어 다수파와 소수파로 나뉘어 대립하였으며, 이들 중 소수파가 조직에서 분리하여 1988년 4월경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출범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988년 6월 '사노맹 출범의 역사적 의의와 사노맹준비위의 당면 임무'라는 문건을 작성하여, 사노맹의 조직적인 기본 방향을 확정하였으며, 1989년 초 『일대전환』이라는 팸플릿을 통해 사업의 기본 방향을 정식화하고 대중 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1989년 4월호부터 『 노동해방문학』을 발간하였다.
1989년 11월 12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사노맹의 출범을 선언하였다. 1990년경의 조직 체계를 보면, 최종 결정 기관으로 중앙위원회가 있었으며, 그 밑에 편집위원회와 조직국을 두었다. 지방 조직으로 지방위원회를 두었으며, 지방위원회는 서울, 인천, 경기, 마창, 울산, 부산, 포항, 대구, 구미, 시(市) 수임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외곽 조직으로 사회주의학생연구소, 노동해방문학사 등이 있었다.
1991년 초에 개편된 조직 체계를 보면, 최종 결정 기관으로 중앙위원회가 있었으며, 그 밑에 중앙정책위원회와 중앙조직위원회를 두었다. 지방 조직으로 지방위원회를 두었으며, 지방위원회는 영남위원회, 수도권위원회, 중부준비위원회, 호남준비위원회, 강원수임자망으로 구성되었다.
1991년 5월에 부분적인 체제 개편을 단행하는데, 이때 중앙위원회를 중앙조직국으로, 중앙정책위원회를 중앙정책국으로 개편하였으며 비서실을 신설하였다. 중앙위원회 내의 중앙상임위원회 제도를 폐지하고 총책, 중앙조직국장, 중앙정책국장으로 구성된 중앙상임위원회를 신설하였다.
사노맹은 창립 후 사회주의적인 선전 선동이나 가두 투쟁, 그리고 경찰서를 비롯한 권력 하부 통치 기구에 대한 타격 투쟁 등 다양한 형태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 1월 사회주의학생연구소를 설립하여 조직적인 지도를 행하였으며, 전국의 여러 공장에 조직원을 파견하여 공장 소조를 건설하고자 시도하였다.
1990년 9월 17일 중간책임자 현정덕이, 10월 1일에는 중앙위원 남진현이 구속되었으며, 1991년 3월 박노해와 김진주가 구속되고 검거 과정에서 조직의 중요 문건이 압수되어 조직 구조가 노출됨에 따라 타격을 받았다. 이어서 1992년 4월 29일 총책 백태웅을 비롯한 중앙위원과 주요 간부들이 대거 구속됨으로써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