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집은 학원 통제와 학생운동 탄압을 목적으로 신군부 세력이 만들어낸 통제 장치 중의 하나이다. 신군부 세력은 대학 사회를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계엄하에서 시위를 전개하다 연행된 학생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강제징집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1980년 9월 4일 서울대생 유시민 등 64명의 입영 조치, 11월 27일 대학생 휴학 및 정학자 일괄 조기 입영 결정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뒤를 이어 1981년 1월 무림사건, 5월의 야학연합회사건, 7월의 학림사건, 11월 9일 고려대 문무대사건, 1981년 11월 종로 연합 가두시위 등 관련된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였다. 이러한 법적인 절차를 무시한 강제입영 조치는 1983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80년 9월 4일부터 시작된 강제징집 대상자는 1984년 11월 강제징집 폐지 때까지 총 1,152명이었다.
강제징집은 1981년 12월 1일 국방부에 의해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이하 특별조치 방침]이 마련되면서 제도화되었다. 특별조치 방침은 학생운동 관련자와 병역 집체훈련 중 시위 주모자 전원을 강제징집 대상으로 결정했으며, 이들은 징병 적정 연령이나 징병검사, 신체 상태, 수형 사유, 소집 면제 등과 관계없이 최우선적으로 징집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특별조치 방침에 따라 강제 징집된 대학생을 ‘특수 학적 변동자’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학생운동 관련 입대자의 부대 배치 기준도 정하였다. 육군은 전원 GOP(General Outpost, 일반전초, 주력 부대를 방호하기 위하여 운용되는 부대)와 FEBA(Forward Edge of Battle Area, 전투지역전단) 부대에 배치하되 수도와 1군단은 제외하도록 했으며, 해군은 서해 5개 도서 지역과 함상에 배치하며, 공군은 배치대상에서 제외하였다.
국방부는 1982년 1월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수정」이라는 문서를 통해 GOP 및 FEBA부대 소총 중대에 배치하던 것을 GP 및 GOP부대 소총 중대에 배치하도록 지침을 하달하였다. 이리하여 강제징집자들은 그동안에 배치됐던 곳보다 더 전방 쪽에 배치되었다.
1983년 12월 21일 ‘학원 자율화 조치’에 따라 제적 학생들이 복교하여 복학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강제징집 관련 의문사 사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학생운동권과 재야 민주단체에서 항의가 이어졌으며, 1984년 3월에는 야당의원들이 강제징집 후 사망한 6명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함으로써 정치 쟁점화되었다.
강제징집에 대한 항의가 거세지고 각계에서 병역 의무를 학생운동 탄압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치자 국방부는 1984년 7월 27일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을 재검토하는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 “현행 방침을 유지하되 그 시행을 잠정적으로 유보하고 가급적 적법 절차에 의해 시행하고, 1984년도 2학기 경과 후 재검토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후 1984년 11월 13일 병무청이 「제적학생 병역처리 지침」을 개정하여 각 지방병무청에 하달함으로써 특수 학적 변동자에 대한 강제징집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