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기만과 폭력에 가득찬 현 정권의 위기를 심화시켜 민주화의 열기를 불태울 것”을 주장한 전국민주화학생연맹[전민학련]이 1981년 2월 27일 결성되면서 1981년 봄 대학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운동 세력에 대한 동향을 감시하던 공안 당국은 6월부터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이끌던 이태복 등을 검거하기 시작하여 26명의 전민학련, 전민노련 관련자를 구속하고 전민학련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면서 ' 학생운동[學] 조직[林]'이라는 의미로 학림사건이라 이름 붙였다. 또한 '학림'은 서울 대학로의 다방 이름이기도 한데, 전민학련이 학림다방에서 첫 모임을 가진 데 착안해 당시 경찰이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비롯한 각종 불법 행위가 자행되었음이 폭로되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배척하고 유죄를 인정하여 이태복에게 무기징역을, 이선근과 박문식에게 각각 징역 7년, 5년을 선고하는 등 25명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