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10월 ‘반제 민족 해방’과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목표로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는 비합법 지하 조직으로, 1977년 1월 외곽 전술 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를 정식으로 발족시켰으며, 11월 22일 남민전 골간 조직인 청년학생위원회(청학위)를 구성하였다.
1978년 초 청학위는 학생, 노동, 농민의 3개 계층별 분과위 결성 방침을 정하고 조직 확대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78년 8월 최초의 부문 운동 조직인 민주구국교원연맹이 만들어졌으며, 이어서 1979년 2월 민주구국학생연맹이, 9월에는 민주구국농민연맹이 결성되었다.
남민전은 지식인층과 혁신계 운동 관계자들, 청년 학생 운동 출신자, 노동자 · 농민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지역적인 기반도 서울 · 경인 지역, 대구 · 영남 지역, 호남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남민전은 유신 체제에 대한 유인물 배포 투쟁, 독점 재벌 및 부유층에 대한 ‘응징 투쟁’을 전개하였다. 유인물 배포 투쟁은 1977년 1월 민투를 정식으로 발족하면서 벌였던 투쟁을 비롯하여 총 7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독점 재벌 및 부유층에 대한 ‘응징 투쟁’은 혜성대와 전위대를 통해서 총 3회에 걸쳐 수행되었다. 1회는 ‘봉화산작전’으로 구자영의 집을 대상으로, 2회는 ‘GS작전’으로 종로2가 소재의 금은방 '보금장'을 대상으로 혜성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GS작전은 이 작전에 참여하기로 한 성원이 불참하여 실패로 끝났는데, 1979년 3월 실패 원인을 분석하면서 혜성대를 상설적인 소수 정예 부대의 전위대로 확대 · 개편하였다. 전위대로 개편한 후 제3회 ‘땅벌작전 1호’로 불린 동아건설 사장의 집을 습격하는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이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다.
남민전은 중요 간부의 피검으로 몇 차례의 비상사태가 있었다. 1976년 초 남민전 발기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병권이 구속되었으며, 1977년 초 1월 투쟁의 수사 과정에서 민투의 조직책이었던 이재오가 피검되었다.
1979년 4월에는 ‘땅벌 1호작전’ 과정에서 이학영이 체포되었으며, 안용웅의 도일과 관련하여 임동규가 구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검거 사건에도 남민전은 조직 보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남민전 조직이 와해된 계기는 1979년 8월 ‘꽃불작전’에 의해서였다. 꽃불작전 과정에서 뿌려진 유인물의 필적 조회를 포함한 당국의 수사에 의해 민학련 조직 지도위원이 검거되고 이어서 남민전 중앙 아지트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79년 10월 4일 중앙 조직이 수사당국에 의해 피습됨으로써 남민전 전모가 드러나고 광범위한 검거 사태를 당하여 결국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체포된 이재문은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남주, 이수일 등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1988년 형 집행 정지 등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2006년 3월 13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