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문신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을 기리기 위하여 1586년(선조 19)에 건립한 신도비이다. 비석은 1577년(선조 10)에 세운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에 소재한 이언적 신도비와 함께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의 전체 높이는 300㎝, 비신은 180㎝이며, 비문의 글씨는 손엽(孫曄, 15441600)이 지었다. 신도비명은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지었다. 참고로 옥산서원의 신도비의 글씨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썼다. 신도비 인근에는 이언적의 신위를 모신 달전재사(達田齋舍)가 있는데, 2012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의 주인공인 이언적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 자계옹(紫溪翁)이며, 초명은 ‘적(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1531년(중종 26) 사간직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경주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574년(선조 7)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면서 강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망했다. 1569년(선조 2) 종묘(宗廟)의 명종(明宗)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묘소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에 관한 역사적 평가 등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