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에 문신으로 활동했던 박수량(1491~1554)의 묘소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에는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아 백비(白碑)라 불리고 있는데,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그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비석의 주인공인 박수량은 자(字)는 군수(君遂), 호는 아곡(我谷),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벼슬은 예조참판,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조정에 출사한 시기가 38년이나 되고 재상에 이르는 직위에까지 올랐지만, 조그만 저택도 없을 정도로 청렴했다고 한다. 박수량이 생전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초야(草野)의 출신으로 외람되게 판서(判書)의 반열에 올랐으니, 영광이 분수에 넘쳤다. 내가 죽거든 절대 시호를 청하거나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장례 치를 비용도 없을 정도로 곤궁해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명종에게 아뢰어 겨우 장사를 치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박수량의 청빈한 삶과 청백리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