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성(獐山城)은 신라 전시기에 걸쳐 왕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았던 산성이다. 신라 수도 서쪽의 방어상 중요했던 경북 경산시에 있었다. 신라 지마이사금 때 압독국을 복속한 후 이후 그곳에 성곽을 구축하였다. 나해이사금이 직접 출정해 이곳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통일기에도 김인문이 지방관으로 파견되어 장산성의 개축을 직접 주도하였다. 이후 신문왕도 달구벌 천도를 앞두고 직접 이곳에 거둥하였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218년(나해이사금 23)에 백제가 신라의 장산성을 포위하자 나해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공격하여 물리쳤다고 한다. 656년(태종무열왕 3)에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당에서 돌아온 후 압독주(押督州) 지방관으로 임명되어 장산성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689년(신문왕 9) 9월에는 장산성이 있었던 장산군(獐山郡)에 신문왕이 직접 거둥하였다.
장산성의 위치는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전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압독주 관내에 있었을 것이다. 압독주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산현의 건치연혁을 참고하면, 지금의 경북 경산시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양주(良州) 장산군(獐山郡)에도 ‘장산군은 지미왕(祗味王: 지마왕) 때에 압량소국(押梁小國: 압독국)을 쳐서 빼앗아 군(郡)을 설치하였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장산군(章山郡)이다’고 되어 있다.
장산성이 있었던 경산은 신라가 수도 경주에서 서쪽의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였다. 이는 이곳이 신라 왕경 방어에 있어 서쪽을 담당하는 중요한 방어성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까닭에 신라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국왕과 왕족이 직접 출정하거나 관심을 두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