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광무 10) 지금의 서울 왕십리에서 아버지 안기종과 어머니 한득종의 9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김신애와의 사이에 두 명의 딸을 두었다.
무신(武臣) 집안 출신이자 정미소 등의 상업에 종사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우고,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진중한 성격에 호기심이 강했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실행에 옮기곤 하였다. 휘문고보 재학 시절에 3·1운동을 경험하면서 과학 기술을 통한 실력 배양에 힘을 쏟고자 과학 분야, 특히 공학(工學) 분야로의 진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경성고등공업학교(현, 서울대학교 공과 대학) 응용 화학과에 입학하였다. 1926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규슈제국대학 응용 화학과에 입학하여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9년에 국내로 돌아와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겸임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 지식의 보급 활동에도 힘을 보탰다. 경성공업전문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자 자신의 선배인 김용관을 도와 『과학조선』의 원고 작성과 대중 과학 강연을 맡는 등 과학 대중화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1934년에 설립된 과학지식보급회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1933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산하의 중앙시험소(中央試驗所) 화학공업부의 기수로 부임해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의 강의와 중앙시험소에서의 연구를 병행하였다. 그가 중앙시험소에서 거둔 가장 중요한 성과로는 1937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전역에 걸쳐 지하수의 수질과 수량, 지질 상태 등을 조사한 공업 용수 조사를 꼽을 수 있다. 조사 결과는 해방 이후에 13편의 보고서로 출판되었고, 해방 후 우리나라 공업 발전을 위한 귀중한 기초 자료가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해방 후 혼란 속에서, 그는 중앙시험소 소장과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장을 맡아 새로운 전기 마련에 힘을 보탰다. 1946년 중앙시험소를 중앙공업연구소로 확대 개편하는 과정을 주도하였으며, 조선화학회(현, 대한화학회)의 창립에도 주도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1948년 제2대 부회장을 거쳐 제3대(19491951), 제6대(19541957), 제9·10대(1963~1966) 회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서 1950년까지 한국인 학자 초청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의 연구원으로 파견되어 미국의 연구소, 대학, 공장 등을 방문하면서 선진 과학 기술과 공업 경제를 탐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953년 국무총리의 추천으로 상공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 상공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제한적이기는 했으나 일반 가정에도 전기와 생필품 등을 제공함으로써 국민들의 생활 편의를 향상시켰다. 또한, 한국의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3F 정책’을 제시하였다. 3F 정책이란 ‘공업화를 위한 자금(Fund)’, ‘식량 증산을 위한 비료(Fertilizer)’, ‘공장을 가동할 에너지와 연료(Force or Fuel)’ 등을 말한다. 특히, 충주비료공장, 인천 판유리 공장, 문경 시멘트 공장, 서울 · 삼척 · 마산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하여 전쟁으로 파괴된 공업 시설을 복구하고 경제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1958년, 한양대학교 공과 대학 화학 공학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서울대학교 · 인하대학교 · 건국대학교 등 다양한 대학에서 화학 공학 강의를 맡아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과학 연구의 토대 마련에 기여할 수 있는 과학 단체 및 연구소, 협회 등의 설립에도 힘을 쏟았다. 한양대 산업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역임하였고(1968~1974), 1971년에 설립된 한국과학원(현, 카이스트(KAIST))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대한요업협회, 한국과학진흥협회, 한국화학공학회 등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저서로는 『과학기술의 건설』(제일출판사, 1946), 『과학신화』(조선공업도서출판사, 1947), 『자연과학개론』(공저)(한양대출판부, 197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