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7월 8일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서 태어났다. 16세에 혼인하였으나, 몇 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였다.
1907년 서울에 올라와 주1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에서 경영하는 성서학원(聖書學院)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부산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1919년 7월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에 가입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에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가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총무 이병철(李秉徹)의 주선으로 통합하여 출범한 단체이다. 혈성단애국부인회는 1919년 3월 오현주(吳玄洲)를 비롯한 정신여학교 졸업생을 주축으로 조직되었으며,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는 같은 해 4월 최숙자(崔淑子), 김원경(金元慶) 등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백신영은 부산 지역을 통괄하는 부산지부장에 선임되어 회비를 납부하고 조직 확대에 힘썼다. 하지만 회장인 오현주의 활동 부진으로 조직이 침체에 빠졌다.
1919년 10월 19일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김마리아(金瑪利亞)와 황에스더를 위로 · 축하하는 다과회 모임에 오현주, 이정숙(李貞淑), 장선희(張善禧), 김영순(金英順), 이혜경(李惠卿)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재건을 위한 조직 및 임원 개편이 이루어졌다.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에 이혜경, 총무 겸 편집원에 황에스더, 적십자 부장에 이정숙 · 윤진수(尹進遂) 등이 선출되었다. 백신영은 이때 이성완(李誠完)과 함께 결사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지방에 지부를 두고 회원을 모집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후원금을 걷었다.
1919년 11월 오현주의 배신으로 경찰에 붙잡혀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해 12월 11일 대구지방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이후 기소되어 예심에 넘겨졌다. 1920년 4월 22일 예심 판결을 앞두고 김마리아와 함께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김마리아와 함께 서울에 올라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그의 지시로 1920년 8월 24일 서울을 방문하는 미국 의원단에 조선이 독립하도록 도와달라는 서면을 제출하려다가 경찰에 발각되기도 하였다.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하였으나,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1년 6월 20일 기각되었다. 병이 회복되자 다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고, 1922년 4월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22년부터 6년간 강경성결교회의 전도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강릉교회를 거쳐 1927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의 체부동교회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성서학원의 여자부 사감으로 10년간 근무하였다. 1934년 9월 성결교단의 전국연합회부인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이후 해산될 때까지 회장직을 맡았고 기관지 『기쁜소식』을 발간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