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완은 일제강점기에 3·1운동에 참여하고 혈성단애국부인회와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일에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함경남도 원산 상동교회 등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1919년 4월 장선희, 오현주, 오현관, 이정숙과 함께 혈성단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혈성단애국부인회는 같은 해 6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로 개편되었다. 이성완은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결사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 원산여자청년회와 정평여자청년회에서 여성청년운동을 이끌었다.
1900년 12월 10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부내면(府內面) 풍흥리(豊興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성원(李誠元)이다.
서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3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1919년 2월 도쿄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金瑪利亞)가 귀국하여 학교로 찾아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자, 이를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이어 3월 1일 만세시위가 시작되자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함경남도 원산 상동교회(上洞敎會) 등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붙잡혔으나 1919년 8월 4일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19년 4월 초순 정신여학교 교사 장선희(張善禧), 황해도 재령군 신명여학교 교사 오현주(吳玄洲), 군산 메리블렌여학교 교사 오현관(吳玄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정숙(李貞淑)과 함께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를 결성하였다. 정신여학교 동창생을 주축으로 만든 이 단체는 투옥된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후원금 모금 활동을 펼쳤다.
혈성단애국부인회는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총무 이병철(李秉澈)의 주선으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와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로 개편되었다.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는 1919년 4월 중순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의 기독교인인 최숙자(崔淑子), 김원경(金元慶), 김희열(金熙烈) 등의 주도하에 60여 명의 회원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이 단체 역시 독립운동 후원금 모금을 위해 결성되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총재에는 오현관, 부총재에는 김희열, 회장에는 오현주, 부회장에는 최숙자 등이 선임되었다.
1919년 10월 19일,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김마리아와 황에스더를 위로 · 축하하는 다과회 모임에 오현주, 이정숙, 장선희, 김영순(金英順), 이혜경(李惠卿), 백신영(白信永)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재건을 위한 조직 및 임원 개편이 이루어졌다.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에 이혜경, 총무 겸 편집원에 황에스더, 적십자부장에 이정숙 · 윤진수(尹進遂) 등이 선출되었다. 이성완은 이때 백신영과 함께 결사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지방에 지부를 두고 회원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낼 후원금을 걷었다. 1919년 11월 오현주의 배신으로 조직이 탄로나 경찰에 붙잡혀 대구로 압송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 방면되었다.
1920년 6월 정평청년회가 주최한 ‘사회를 발전시킴에는 여자교육이 남자교육보다 승(勝)함’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찬성편 대표로 나섰다. 그해 원산 진성여학교(進誠女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원산여자청년회 사교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4월에는 정평에 있는 삼광여학교(三光女學校)로 옮기고, 그해 6월부터 정평여자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다시 원산으로 돌아와 진성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