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교정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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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주동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이어 시중(侍中)까지 오른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준이 유경·박송비 등과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후 김준은 자기 휘하의 위사공신들과 연대하여 유경 등을 실각시키면서 ‘김준 정권’을 탄생시키고, 1265년(원종 3) 시중에 오르면서 해양후(海陽侯)에도 책봉되었다. 그는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국왕 원종 및 몽골과 갈등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참살되었다.
김준 (金俊)
김준은 1258년(고종 45) 무오정변(戊午政變)을 주동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이어 시중(侍中)까지 오른 무신이다. 무오정변은 김준이 유경·박송비 등과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4대 집정자 최의를 제거하여 왕정복고를 이룬 정변을 가리킨다. 이후 김준은 자기 휘하의 위사공신들과 연대하여 유경 등을 실각시키면서 ‘김준 정권’을 탄생시키고, 1265년(원종 3) 시중에 오르면서 해양후(海陽侯)에도 책봉되었다. 그는 정권을 독차지하면서 국왕 원종 및 몽골과 갈등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참살되었다.
교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무신 집권기 최고의 권력 기관이다.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하며, 최씨 정권기 국가의 비위와 규찰, 세정 업무 및 인사 행정 등 국정을 총괄하였다. 교정도감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였지만 이후 권신들의 중추적 구실을 하는 정청(政廳)이 되어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별감은 원칙적으로 직위가 장군인 사람만 임명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왕명에 의해 임명되지만 실제는 최고 무신 집권자가 자동적으로 승계했다. 1270년(원종 11)에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소멸됐다.
교정도감 (敎定都監)
교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무신 집권기 최고의 권력 기관이다. '교정소(敎定所)'라고도 하며, 최씨 정권기 국가의 비위와 규찰, 세정 업무 및 인사 행정 등 국정을 총괄하였다. 교정도감은 비상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였지만 이후 권신들의 중추적 구실을 하는 정청(政廳)이 되어 강력한 기능을 발휘했다. 교정도감의 장관인 교정별감은 원칙적으로 직위가 장군인 사람만 임명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왕명에 의해 임명되지만 실제는 최고 무신 집권자가 자동적으로 승계했다. 1270년(원종 11)에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소멸됐다.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무신정권 (武臣政權)
무신정권은 1170년부터 1270년 사이에 무신 세력에 의해 주도된 고려 왕조의 정권이다. 무신 세력은 삼별초 등 사병집단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정방·교정별감 등의 기구를 설치하여 전횡을 일삼고 독재정치를 행하였다. 무신정권기에 불법적 토지 강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농민과 천민 등 하부계층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민란 발생과 더불어 신분질서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신정권 집권 후반부 40년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팔만대장경 제조 등으로 강렬한 민족주체의식이 발휘되었고 이는 후대의 배원정책으로 이어졌다.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우 (崔瑀)
최우는 고려후기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집권자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249년(고종 36)에 사망했다. 부친 최충헌이 죽자 교정별감이 되어 부친 집권시의 폐단을 없애고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했다.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충지에 성을 쌓았고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문무백관의 인사를 처리했으며,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천도를 단행하게 했다. 야별초를 조직하여 야간에 도둑을 단속하게 했으며, 장학에도 노력했고 사재를 털어 대장경 제조에도 착수했다. 말년에는 횡포와 사치가 심해 백성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최의(崔竩)는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崔氏武臣政權)의 제4대 집정자(1257~1258, 고종 44~45)이다. 그는 몽골의 대대적인 침략 와중에 아버지 최항(崔沆)을 이어서 최씨무신정권의 집정자가 되었다. 이 시기는 대몽골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권력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최의로서는 특정 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결국에는 김준(金俊)·유경(柳璥) 등 측근의 배신으로 최씨무신정권 자체가 무너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최의 (崔竩)
최의(崔竩)는 고려 후기 최씨무신정권(崔氏武臣政權)의 제4대 집정자(1257~1258, 고종 44~45)이다. 그는 몽골의 대대적인 침략 와중에 아버지 최항(崔沆)을 이어서 최씨무신정권의 집정자가 되었다. 이 시기는 대몽골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권력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최의로서는 특정 세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결국에는 김준(金俊)·유경(柳璥) 등 측근의 배신으로 최씨무신정권 자체가 무너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이다. 1149년(의종 3)에 태어나 1219년(고종 6)에 사망했다. 그는 피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봉사십조(封事十條)’의 개혁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반대 세력의 저항을 평정하기 위해 도방(都房)·교정도감(敎定都監) 등 사적 권력 기구를 강화하였다. 이후 그의 권력은 4명의 국왕을 교체할 정도로 막강하였고, 4대 60여 년간 최 씨 무신 정권을 유지할 권력 기반을 닦았다.
최충헌 (崔忠獻)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 집정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역임한 무신이다. 1149년(의종 3)에 태어나 1219년(고종 6)에 사망했다. 그는 피의 숙청을 통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한편, ‘봉사십조(封事十條)’의 개혁책을 올리기도 하였다. 반대 세력의 저항을 평정하기 위해 도방(都房)·교정도감(敎定都監) 등 사적 권력 기구를 강화하였다. 이후 그의 권력은 4명의 국왕을 교체할 정도로 막강하였고, 4대 60여 년간 최 씨 무신 정권을 유지할 권력 기반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