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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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부터 일제가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한 쌀 증식정책.
산미증식계획 (産米增殖計劃)
1920년부터 일제가 조선을 자국의 식량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한 쌀 증식정책.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에 있는 항구.
군산항 (群山港)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에 있는 항구.
대전광역시 대덕구 대전조차장역과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역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
호남선 (湖南線)
대전광역시 대덕구 대전조차장역과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역 사이를 연결하는 철도.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민형남 (閔馨男)
조선 후기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식산계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설립된 농촌 경제 단체이다. 계원의 경제 발달을 위해 공동 사업을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식산계는 금융조합의 엄격한 지도 감독을 받았고, 식산계의 공동 사업과 금융조합의 자금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40년 전시 농업 정책이 실시되자 식산계는 농촌 지역의 물자 수집과 배급을 담당하는 경제 통제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식산계 (殖産契)
식산계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설립된 농촌 경제 단체이다. 계원의 경제 발달을 위해 공동 사업을 운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식산계는 금융조합의 엄격한 지도 감독을 받았고, 식산계의 공동 사업과 금융조합의 자금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940년 전시 농업 정책이 실시되자 식산계는 농촌 지역의 물자 수집과 배급을 담당하는 경제 통제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고려시대 진헌해 온 물품을 보관하거나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공판을 관장하던 임시관서.
공판도감 (供辦都監)
고려시대 진헌해 온 물품을 보관하거나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공판을 관장하던 임시관서.
영산강 하굿둑은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읍 나불리 사이의 영산강 하구를 가로막은 하굿둑이다. 1970년대 영산강지구 종합개발계획 제2단계사업으로 건설되었다. 하굿둑 위에는 너비 10m의 도로가 개설되어 두 지역을 쉽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하굿둑의 건설로 거대한 인공호인 영산호가 형성되어 하구 일대의 207㎢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5만 6000톤의 미곡 증산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32.5㎢에 달하는 농지가 조성되었다. 또한 남서해안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등장하여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고 있다.
영산강 하굿둑 (榮山江 河口둑)
영산강 하굿둑은 전라남도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읍 나불리 사이의 영산강 하구를 가로막은 하굿둑이다. 1970년대 영산강지구 종합개발계획 제2단계사업으로 건설되었다. 하굿둑 위에는 너비 10m의 도로가 개설되어 두 지역을 쉽게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하굿둑의 건설로 거대한 인공호인 영산호가 형성되어 하구 일대의 207㎢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5만 6000톤의 미곡 증산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고, 32.5㎢에 달하는 농지가 조성되었다. 또한 남서해안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등장하여 전국에서 관광객이 찾고 있다.
미곡수집령은 미군정기에 쌀 공급이 줄어들고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이 1946년 2월 1일부로 시행한 쌀의 강제수매 제도이다. 해방 후 농촌의 쌀 소비가 늘고 도시 반입량이 줄어 품귀 현상을 빚자 미군정은 1946년 1월 일제말의 쌀 공출제와 같은 내용의 농가 잉여미의 강제수매 제도를 시행하였다. 수집 시기를 놓친 1946년의 실적(1945년 쌀의 수집 실적)은 좋지 않았으나 1947년과 1948년에는 수집 실적이 좋았다. 미군정은 거의 계획대로 수집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도시 식량 문제의 완화에 일조하였으나 농민의 반발을 샀다.
미곡수집령 (米穀收集令)
미곡수집령은 미군정기에 쌀 공급이 줄어들고 쌀값이 폭등하자 미군정이 1946년 2월 1일부로 시행한 쌀의 강제수매 제도이다. 해방 후 농촌의 쌀 소비가 늘고 도시 반입량이 줄어 품귀 현상을 빚자 미군정은 1946년 1월 일제말의 쌀 공출제와 같은 내용의 농가 잉여미의 강제수매 제도를 시행하였다. 수집 시기를 놓친 1946년의 실적(1945년 쌀의 수집 실적)은 좋지 않았으나 1947년과 1948년에는 수집 실적이 좋았다. 미군정은 거의 계획대로 수집할 수 있었다. 이로써 도시 식량 문제의 완화에 일조하였으나 농민의 반발을 샀다.
「조선농업창고령」은 1931년에 제정된 농업창고업에 관한 조선총독부 제령이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 4월에 조선미곡창고계획을 발표하여, 기존의 농업 창고를 미곡 창고로 개칭하고 미곡 창고를 늘렸는데, 계속되는 풍작으로 저장해야 할 미곡의 양이 늘고, 기간도 길어지자 지주와 농민들의 재정적 압박이 심해졌다. 미곡 창고가 창하 증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여, 보관 의뢰자인 지주, 농민들에게 자금 융통의 길을 확대하기 위해 「조선농업창고령」을 제정하였다.
조선농업창고업령 (朝鮮農業倉庫業令)
「조선농업창고령」은 1931년에 제정된 농업창고업에 관한 조선총독부 제령이다. 조선총독부는 1930년 4월에 조선미곡창고계획을 발표하여, 기존의 농업 창고를 미곡 창고로 개칭하고 미곡 창고를 늘렸는데, 계속되는 풍작으로 저장해야 할 미곡의 양이 늘고, 기간도 길어지자 지주와 농민들의 재정적 압박이 심해졌다. 미곡 창고가 창하 증권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여, 보관 의뢰자인 지주, 농민들에게 자금 융통의 길을 확대하기 위해 「조선농업창고령」을 제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