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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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개경을 설치한 곡식 창고.
대의창 (大義倉)
고려시대 개경을 설치한 곡식 창고.
배은희는 일제강점기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한 장로교 목사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경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태형을 받았으며,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해방 후에는 정치운동에 참가하여 고시위원장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다.
배은희 (裵恩希)
배은희는 일제강점기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한 장로교 목사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경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태형을 받았으며,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해방 후에는 정치운동에 참가하여 고시위원장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다.
조선 후기에, 사릉참봉, 신천군수,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서종제 (徐宗悌)
조선 후기에, 사릉참봉, 신천군수,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강원도도사, 홍문관부응교, 개성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서명구 (徐命九)
조선 후기에, 강원도도사, 홍문관부응교, 개성유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일제강점기 오산교회, 평양 서문밖교회, 대타령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 부흥사.
임종순 (林鍾純)
일제강점기 오산교회, 평양 서문밖교회, 대타령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 부흥사.
해방 이후 아주무역, 동국무역 등을 설립한 기업인.
백욱기 (白煜基)
해방 이후 아주무역, 동국무역 등을 설립한 기업인.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지공파 하협종택에 전래된 문서이다. 2006년 11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분재기 22점, 호적관련문서 42점, 소지류 26점, 시권 7점 등 총 126점이다. 분재기는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의 기록인데, 재산의 분류가 부변(父邊)과 모변(母邊)으로 나누어져 있는 현상, 자식은 물론 친인척에게 분재한 기록 등 여러 가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호적류는 지역의 유력한 사대부가문의 가족과 재산 및 인구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진주 단목리 단지 하협 종택 소장 고문서 (晋州 丹牧里 丹池 河悏 宗宅 所藏 古文書)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지공파 하협종택에 전래된 문서이다. 2006년 11월 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분재기 22점, 호적관련문서 42점, 소지류 26점, 시권 7점 등 총 126점이다. 분재기는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의 기록인데, 재산의 분류가 부변(父邊)과 모변(母邊)으로 나누어져 있는 현상, 자식은 물론 친인척에게 분재한 기록 등 여러 가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호적류는 지역의 유력한 사대부가문의 가족과 재산 및 인구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446년에, 정인지, 신숙주 등이 훈민정음 예의, 해례, 정인지 서문 등을 담아 간행한 훈민정음 해설서.
훈민정음 (訓民正音)
1446년에, 정인지, 신숙주 등이 훈민정음 예의, 해례, 정인지 서문 등을 담아 간행한 훈민정음 해설서.
일제강점기 양성학교 교사, 기전여학교 교사 등을 역임한 교육자. 개신교인, 여성운동가.
방애인 (方愛人)
일제강점기 양성학교 교사, 기전여학교 교사 등을 역임한 교육자. 개신교인, 여성운동가.
이영식은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교회가 중심이 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특수 교육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출생하여 1981년 사망하였다. 1919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구와 서울에서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뤘다. 1927년 일본에서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에서 7년간 나환자들과 생활하였다. 1946년에는 대구맹아학원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정신지체아를 위한 대구보명학교와 지체장애아를 위한 대구보건학교를 설립하였다. 1981년 괌에서 무명 동포 위령사업을 추진하던 중 87세로 생을 마쳤다.
이영식 (李永植)
이영식은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교회가 중심이 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특수 교육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출생하여 1981년 사망하였다. 1919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구와 서울에서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뤘다. 1927년 일본에서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에서 7년간 나환자들과 생활하였다. 1946년에는 대구맹아학원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정신지체아를 위한 대구보명학교와 지체장애아를 위한 대구보건학교를 설립하였다. 1981년 괌에서 무명 동포 위령사업을 추진하던 중 87세로 생을 마쳤다.
이만집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및 대구 지역 3 · 1운동과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한 개신교 장로교계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3년 4월 한국 교회의 자치운동을 강조한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하였고,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하다 1944년 6월 8일 사망하였다.
이만집 (李萬集)
이만집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및 대구 지역 3 · 1운동과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한 개신교 장로교계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1923년 4월 한국 교회의 자치운동을 강조한 교회 자치선언을 주도하였고,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는 등 신앙생활에 전념하다 1944년 6월 8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