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은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교회가 중심이 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특수 교육자이다. 1894년(고종 31)에 출생하여 1981년 사망하였다. 1919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구와 서울에서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뤘다. 1927년 일본에서 고베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에서 7년간 나환자들과 생활하였다. 1946년에는 대구맹아학원을 설립하였다. 1967년에 정신지체아를 위한 대구보명학교와 지체장애아를 위한 대구보건학교를 설립하였다. 1981년 괌에서 무명 동포 위령사업을 추진하던 중 87세로 생을 마쳤다.
본관은 성산(星山), 초명은 영식(永植), 호는 성산(惺山) 혹은 청산유수(靑山流水). 경상북도 성주 출신. 1919년 계성학교를 졸업할 무렵 대구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른 후,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고국으로 돌아와 대구애락원 나환자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고, 그 후 만주국 간도성 명월구 제일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활동하였다.
광복 후 대구애생원 나환자교회를 설립하여 시무(視務)하다가, 1946년 대구맹아학원을 설립하여 장애아동 교육에 헌신해 오던 중, 1956년 장애인복지와 특수교육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한국사회사업대학(현재 대구대학교 전신)을 설립하였다.
그는 평생을 장애인복지와 교육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광복 후 한국 특수교육과 장애인복지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부친 이순구(李順九)와 모친 김덕희(金德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나이 5세 때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어머니가 큰 병을 앓은 후 기독교를 믿고 의지함에 따라, 14세에 성주 대가면 옥화리 교회부설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개신교 선교사가 설립한 대구 계성학교에서 5년제 과정을 근로 장학생 신분으로 어렵게 수학하였다.
계성학교 5학년 재학 시에 독립만세운동(1919)이 전개되자, 이만집 등과 대구지역 교회가 중심이 되어 항일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복역하고, 서울에서 수원, 조치원, 청주, 공주, 대전, 상주, 김천, 대구, 경주로 옮겨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에 다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神戶)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대구서문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명여고를 졸업한 박두순(朴斗順)과 결혼하였다. 교회중심의 신앙에 회의를 품고 고민하던 중에 대구애락원(愛樂園) 나환자 교회에 부임하여, 약 7년간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구를 떠나 함경북도 성진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하였고, 1941년에는 만주국 간도성 명월구(明月溝) 제일교회에서 3년간 시무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의 조선인교회에서 시무하던 중에 곧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감하고 광복 직전에 귀국하였다.
8·15 광복을 맞아 서둘러 대구애생원 나환자교회를 설립하여 시무하였다. 이어 1946년에는 광복기념사업으로 대구맹아학원(大邱盲啞學院)을 설립하여 심신장애인의 교육과 복지에 평생 헌신하였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대구는 아직도 전국적으로 장애인교육과 복지의 메카가 되고 있다.
6·25 한국전쟁 발발 후에 대구맹아학교는 무기휴학하고, 가족 피난을 위해 고향에 갔다가 인민위원회에 연행되어 성주 가천지서에 수감되어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나환자와 장애인을 위해 헌신해 온 그간의 이력이 밝혀지자, ‘결코 죽일 수 없는 사람’으로 판명되어 총살 직전에 극적으로 죽음을 모면하였다.
6·25 종전 후에 대구맹아학교의 경영이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경상북도 사회사업연합회 회장에 피선되고, 이듬해에는 한국맹농아교육기관 연합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특수교육분야와 사회복지분야의 전문가 양성 필요성을 절감하던 차에, 1956년 일본서 귀국한 장남 이태영(李泰榮)의 도움으로 대학설립 전단계로 한국이공학원을 설립하였다.
특수교육분야의 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1961년 한국사회사업대학이 정규 4년제 대학으로 인가되어 초대학장이 되었으나, 곧장 장남 이태영에게 대학 운영을 넘겨주었다. 1965년 미국 특수교육계를 시찰하였고, 맹교육과 농교육 중심의 특수교육에서 탈피하여 정신지체아의 특수교육을 위해 1967년에 대구보명학교와 지체장애아를 위한 대구보건학교를 각각 설립하였다.
노년에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태평양지역 사이판과 티니안 군도에서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 5천 여구를 천안 ‘망향의 동산’으로 봉환하여 안장하는 사업을 주도하였다. 말년에 안중근 의사 동상건립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괌도로 건너가 무명 동포 위령사업을 추진하던 중 87세로 일생을 마쳤다.
인류의 보편이념이면서 학교법인 영광학원과 대구대학교 건학정신을 반영한 『사랑 · 빛 · 자유』(대구대출판부, 1984), 자전적 생애와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사랑의 길 소망의 길』(대구대출판부, 1986), ‘죽일 수 없는 사람’으로 그의 생애를 미국의 전기 작가가 펴낸 『 I Cast Out Fear』(Evelyn Hannon, 196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