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곡산 출신. 1911년 평양 숭실 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6월 목사안수를 받고 곡산 지방 순회목사로 파송되었다.
1921년 9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열린 만국장로교연합총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하여 ‘조선교회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귀국하여 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할 것뿐이오니 실력양성이 제일인 줄 압니다. 우리 총회에서 인물양성을 어서 속히 힘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고 하여 한국교회의 자립과 함께 자주의 책임과 권한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 뒤 평안북도 정주 오산교회(五山敎會) 목사로 시무하다가 1929년 평양 서문밖교회로 옮겼다. 서문밖교회에는 매회 3,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였으며, 그 여파가 전국적으로 퍼져 부흥사로도 활약하였다.
1935년 평양 대타령교회(大駝嶺敎會)로 옮겼다. 1936년 제25회 장로교 총회에서 남북대립이 격화하여 남부총대들이 남 총회분립운동을 일으켜 총회가 분열 직전에 있을 때, 교회의 합동을 호소하여 분열의 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