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오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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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항은 고려 후기에 별감사, 밀직사, 첨의평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일찍이 대성할 재목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군인 선발 등의 행정 업무를 잘 처리하여 신임을 받았다. 그가 전영보의 비리를 캐다가 갈등으로 인해 유배를 가기도 하였으나, 충숙왕 즉위 이후 고위직이 되었다. 이후 충선왕의 환국 요청을 하는 등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백원항 (白元恒)
백원항은 고려 후기에 별감사, 밀직사, 첨의평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일찍이 대성할 재목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군인 선발 등의 행정 업무를 잘 처리하여 신임을 받았다. 그가 전영보의 비리를 캐다가 갈등으로 인해 유배를 가기도 하였으나, 충숙왕 즉위 이후 고위직이 되었다. 이후 충선왕의 환국 요청을 하는 등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김원상은 고려 후기 충렬왕~충혜왕대에 활동한 문신이자 간신이다. 오잠, 석천보, 석천경 등과 함께 충렬왕에게 아부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적과 함께 심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편, 국가의 비밀을 심왕에게 알려주었다.
김원상 (金元祥)
김원상은 고려 후기 충렬왕~충혜왕대에 활동한 문신이자 간신이다. 오잠, 석천보, 석천경 등과 함께 충렬왕에게 아부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적과 함께 심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편, 국가의 비밀을 심왕에게 알려주었다.
고려 후기에, 동지밀직사사, 대사헌, 판도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김천보 (金千寶)
고려 후기에, 동지밀직사사, 대사헌, 판도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후기 비서감, 좌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폐신(嬖臣).
오연 (吳演)
고려후기 비서감, 좌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폐신(嬖臣).
이언적은 조선전기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성종 22)에 태어나 1553년(명종 8)에 사망했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7년간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복직 후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추국하는 역할이 주어지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유배됐고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준 인물이다.
이언적 (李彦迪)
이언적은 조선전기 예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성종 22)에 태어나 1553년(명종 8)에 사망했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7년간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복직 후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을사사화가 발생하여 추국하는 역할이 주어지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유배됐고 유배지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준 인물이다.
고려 후기에, 병부총랑, 우상시지내지 등을 역임한 문신.
정선 (鄭僐)
고려 후기에, 병부총랑, 우상시지내지 등을 역임한 문신.
입성책동은 고려 후기 고려를 원나라의 행정 구역 중 하나인 행중서성(行中書省)으로 편입하고자 획책했던 사건이다. 총 7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1차와 2차는 요양행성(遼陽行省)과 그곳의 고관이었던 홍중희(洪重喜)가, 3차와 4차, 7차는 부원(附元)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일으켰으며, 5차와 6차는 원나라 측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고려 측은 고려 왕조 체제를 보전하는 것이 세조(世祖) 황제의 유지라는 점과 행성을 설립했을 경우 실익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
입성책동 (立省策動)
입성책동은 고려 후기 고려를 원나라의 행정 구역 중 하나인 행중서성(行中書省)으로 편입하고자 획책했던 사건이다. 총 7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1차와 2차는 요양행성(遼陽行省)과 그곳의 고관이었던 홍중희(洪重喜)가, 3차와 4차, 7차는 부원(附元)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일으켰으며, 5차와 6차는 원나라 측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고려 측은 고려 왕조 체제를 보전하는 것이 세조(世祖) 황제의 유지라는 점과 행성을 설립했을 경우 실익이 없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논의는 실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