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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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맥 (李陌)
조선 전기에,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포항 오덕리 사우정고택은 조선 전기 정언각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당시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위치한 애은당 고택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에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루게 된 주택이다. ㅡ자형의 사랑채를 전면에 두고 조금 떨어져 남쪽으로 트인 ㄷ자형의 안채를 뒤쪽에 놓아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동북측 담장 모서리에 사당의 옛터가 있었는데, 최근 복원하였다.
포항 오덕리 사우정고택 (浦項 吾德里 四友亭古宅)
포항 오덕리 사우정고택은 조선 전기 정언각이 청송부사로 재직할 당시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같은 마을에 위치한 애은당 고택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에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루게 된 주택이다. ㅡ자형의 사랑채를 전면에 두고 조금 떨어져 남쪽으로 트인 ㄷ자형의 안채를 뒤쪽에 놓아 튼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 동북측 담장 모서리에 사당의 옛터가 있었는데, 최근 복원하였다.
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가족들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사용했던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였던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이 이강을 입향조로 하여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좌우가 반전된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 고방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나 후대에 중수되면서 건립 당시의 모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 (浦項 吾德里 愛隱堂 故宅)
포항 오덕리 애은당 고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의 가족들이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사용했던 포항 덕동마을의 주택이다. 임진왜란 이후 정문부가 고향인 진주로 돌아가면서 손녀사위였던 사의당(四宜堂) 이강(李壃)에게 물려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덕동마을이 이강을 입향조로 하여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을 이룬 계기가 되었다. 좌우가 반전된 ㄱ자형의 안채와 ㅡ자형의 사랑채, 고방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나 후대에 중수되면서 건립 당시의 모습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 후기에, 정언, 장령, 태안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사조 (李師祚)
조선 후기에, 정언, 장령, 태안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일제강점기 때, 혈성부인회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대동단에서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복역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 교육자·독립운동가.
이신애 (李信愛)
일제강점기 때, 혈성부인회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고, 대동단에서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복역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한 교육자·독립운동가.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부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칙 (李則)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부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정종로는 조선 후기 『입재집』, 『소대명신언행록』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38년(영조 14)에 출생하여 1816년(순조 16)에 사망하였다. 자는 사앙, 호는 입재, 무적옹이다. 관직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매진하다가 만년에 천거로 강령현감, 함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향리로 내려가 성리학의 연구와 후학양성 및 저술에 힘썼다. 정종로는 〈태극권자설〉과 〈태극동정설〉 등에서 태극과 동정을 분리시키는 이원주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인물성동이론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품은 서로 같을 수 없다는 상이론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정종로 (鄭宗魯)
정종로는 조선 후기 『입재집』, 『소대명신언행록』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738년(영조 14)에 출생하여 1816년(순조 16)에 사망하였다. 자는 사앙, 호는 입재, 무적옹이다. 관직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매진하다가 만년에 천거로 강령현감, 함창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향리로 내려가 성리학의 연구와 후학양성 및 저술에 힘썼다. 정종로는 〈태극권자설〉과 〈태극동정설〉 등에서 태극과 동정을 분리시키는 이원주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인물성동이론에서 사람과 사물의 성품은 서로 같을 수 없다는 상이론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미국으로 노동 이민하여 공립협회 · 대한신민회 ·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독립운동을 지원한 실업가이다. 1876년 10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03년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로 왔다가 1904년경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905년 4월 안창호가 공립협회를 설립할 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20년 2월 윌로스에서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할 때 신광희와 함께 재무가 되어 비행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1943년 진보적 언론인 『독립』을 적극 후원하면서 친공적 성향의 인사로 활동하였다.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재수 (李在洙)
일제강점기 때 미국으로 노동 이민하여 공립협회 · 대한신민회 ·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독립운동을 지원한 실업가이다. 1876년 10월 21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03년 노동 이민으로 하와이로 왔다가 1904년경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905년 4월 안창호가 공립협회를 설립할 때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1920년 2월 윌로스에서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할 때 신광희와 함께 재무가 되어 비행학교를 적극 후원하였다. 1943년 진보적 언론인 『독립』을 적극 후원하면서 친공적 성향의 인사로 활동하였다.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