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정미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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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숙은 대한제국기 심남일 의진에서 도통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심남일 지휘 아래 1908년 3월의 강진 오치동 전투, 1908년 10월의 능주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8월 석정 전투 패배 후 능주로 피신하였다.
김도숙 (金道淑)
김도숙은 대한제국기 심남일 의진에서 도통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심남일 지휘 아래 1908년 3월의 강진 오치동 전투, 1908년 10월의 능주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8월 석정 전투 패배 후 능주로 피신하였다.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은 1908년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 군사장(軍師長)으로서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한 허위에 관한 기록이다. 필사본으로 허위의 족손(族孫) 허복(許馥)이 엮은 것으로, 허경성(許敬誠)이 지녀온 것이다. 내용은 1896년(고종 33) 3월 10일에 거병하여 김천을 공격한 사실부터 시작해서 1907년(순종 원년)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1908년(순종 2) 5월 일본군에게 잡혀 죽기까지의 사적(事績)이 약술되어 있다.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은 1908년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 군사장(軍師長)으로서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한 허위에 관한 기록이다. 필사본으로 허위의 족손(族孫) 허복(許馥)이 엮은 것으로, 허경성(許敬誠)이 지녀온 것이다. 내용은 1896년(고종 33) 3월 10일에 거병하여 김천을 공격한 사실부터 시작해서 1907년(순종 원년)에 다시 의병을 일으켜 1908년(순종 2) 5월 일본군에게 잡혀 죽기까지의 사적(事績)이 약술되어 있다.
대한제국기 때, 아버지인 의병장 유인석을 보좌하며 의병장 비서직으로 활동하였고, 국권 피탈 이후 대한독립단의 총재비서직 등을 역임한 의병·독립운동가.
유해동 (柳海東)
대한제국기 때, 아버지인 의병장 유인석을 보좌하며 의병장 비서직으로 활동하였고, 국권 피탈 이후 대한독립단의 총재비서직 등을 역임한 의병·독립운동가.
의병은 조선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이민족의 침략에 저항한 자발적인 백성의 군대이다.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1, 2차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시기에 활동한 의병은 활동 목표, 방향에 따라서 다소 성격을 달리한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향병과 근왕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의 의병은 일본군에 대한 저항과 국왕의 호위라는 명분에 따라 창의(倡義)하여 활동하였다. 병자호란 때의 의병은 근왕병의 성격이 강하였다.
의병 (義兵)
의병은 조선 이후부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이민족의 침략에 저항한 자발적인 백성의 군대이다.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하여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1, 2차 의병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시기에 활동한 의병은 활동 목표, 방향에 따라서 다소 성격을 달리한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은 향병과 근왕병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때의 의병은 일본군에 대한 저항과 국왕의 호위라는 명분에 따라 창의(倡義)하여 활동하였다. 병자호란 때의 의병은 근왕병의 성격이 강하였다.
최병헌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 겸 신학자, 언론인, 정미의병 선유사로 활동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정동교회를 담임하여 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목회 활동뿐만 아니라 근대적 선각자로 한말 언론인,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농상공부 관료, 대한제국 선유사로 충청남도에 파견되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유사로 파견되어 정미의병과 백성의 실태를 보고한 부분은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지만 보고문 자체가 소중한 역사 자료란 의의가 있다.
최병헌 (崔炳憲)
최병헌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정동제일교회 담임 목사 겸 신학자, 언론인, 정미의병 선유사로 활동하였다. 감리교 최초의 한국인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정동교회를 담임하여 교회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목회 활동뿐만 아니라 근대적 선각자로 한말 언론인,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YMCA) 지도자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농상공부 관료, 대한제국 선유사로 충청남도에 파견되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선유사로 파견되어 정미의병과 백성의 실태를 보고한 부분은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지만 보고문 자체가 소중한 역사 자료란 의의가 있다.
이석담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의병에게 숙식과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은사금 지급을 거부한 여성 항일운동가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에 반발하여 정미의병이 봉기하였을 때, 황해도 평산군에서 의병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평산 지역의 유서 깊은 양반가 안주인이었으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일합병 후에도 일제가 민심 수습 차원에서 지급한 임시은사금을 거부하는 등 저항 의식을 보여주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이석담 (李石潭)
이석담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 의병에게 숙식과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은사금 지급을 거부한 여성 항일운동가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에 반발하여 정미의병이 봉기하였을 때, 황해도 평산군에서 의병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자금을 지원하였다. 평산 지역의 유서 깊은 양반가 안주인이었으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의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일합병 후에도 일제가 민심 수습 차원에서 지급한 임시은사금을 거부하는 등 저항 의식을 보여주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