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수안(遂安)이다.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마산면(馬山面) 대경리(大慶里) 출신이며, 1859년생으로 추정된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11대손인 이한영(李漢永)의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명은 서염윤(徐艶潤) · 서정민공(徐貞憫恭) · 이서홍(李書虹)이다. 19세에 혼인한 신언구(申彦九)가 사망하자, 양반가의 안주인으로 집안을 이끌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등에 반발하여 정미의병이 봉기하였는데, 황해도 평산 지역에서는 조맹선(趙孟善) 등의 부대가 활동하였다. 평산은 황해도 화서학파의 본거지와 같은 지역으로, 성리학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하였다. 유교의 기풍을 받은 평산 사람들은 외세를 배척하는 성향이 강하였고, 의병과 친인척관계로 얽혀있는 경우가 많아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평산은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석담은 의병장 이진용(李鎭龍), 조맹선 휘하의 부하를 숨겨주고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한편,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후, 곧바로 임시은사금(臨示恩賜金)의 지급을 발표하였다. 임시은사금은 1910년 8월 29일 천황이 제국 정부의 인가를 받아 발행한 3,000만 원 상당의 임시 공채였다. ‘은사’란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하사한다는 뜻인데, 천황이 조선에 은사금을 지급한다는 것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이 사업의 일차적인 목표는 불안한 치안 문제를 해결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식민 통치에 우호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것도 임시은사금 사업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임시은사금은 병합에 공로를 세운 사람과 양반과 같은 구지배층, 효자와 절부(節婦), 주1에게 지급되었다. 양반을 지급 대상으로 한 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협조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절부와 효자, 노인과 빈민 등에 대한 지급은 유교적인 이념을 식민 지배에 활용한 것이었다.
지역 사회에서 인정하는 열녀 및 효부에게 은사금이 지급될 때 이석담도 지급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석담은 황해도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의 중심인 유서 깊은 양반가의 일원이었으므로, 일제의 입장에서 중요한 포섭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은사금 지급을 완강히 거절하여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 1930년 사망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