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2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이도로티이다.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대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3·1운동 때 국내에 잠입하여 만세시위를 지원하였다.
1919년 4월 11일에 김순애(金順愛), 이선실(李善實), 강천복(姜千福), 박인선(朴仁善), 오의순(吳義順) 등과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를 설립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단체였다. 초대 회장은 김순애였고, 이화숙은 1919년 9월 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단체는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화숙이 회장으로 있을 때도 안창호가 많은 조언을 하였다.
이화숙은 1919년 9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참사(參事)로 임명되었다. 1919년 10월 31일 ‘임시정부의 선언서 및 공약 3장’이 발표될 때는 대한민족대표 30명에 여성 대표로서 참여하였다.
이화숙은 1920년 1월 설립된 대한적십사회의 부설 간호원양성소에서 간호원 교육도 이수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독립 전쟁으로 인한 부상병을 구호할 목적으로 설립된 구호 단체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조직이었다. 간호원양성소의 수업 기간은 3개월이었고, 매주 18시간의 수업을 받았다. 실습은 중국 홍십자병원에서 하였다. 이화숙은 김연실, 김원경, 오남희, 이메리 등과 함께 1기로 간호사양성소를 수료하였다.
이화숙은 1920년 중반경에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 정순만(鄭淳萬)의 맏아들 정양필(鄭良弼)과 결혼하고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정착하였다. 이화숙은 도미 후에도 상하이에서 맺은 동지들과 관계를 이어갔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출연하는 등 광복 때까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