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태어났다.
1932년 명천군 명천읍 공립국민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경흥군 아오지탄광 광산촌에 거주하였다. 1940년 1월 중순 야학을 설치해 부녀자들의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그러던 중 1941년 3월 일본인 경찰에 붙잡혀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3개월간 고문을 당하다 병을 얻어 석방되었다.
이후 1942년 서울로 상경하였다. 창씨개명으로 인한 일본식 가족제도의 강제, 일본어 사용, 신사 참배 등 황민화 정책이 한창이던 시기였음에도, 주변 사람들과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교회를 다니며 알게 된 전영신(全榮信) 등의 여성들에게 『단종애사(端宗哀史)』, 『이차돈(李次頓)의 죽음』과 같은 소설의 내용을 알려주고, 한국의 역사와 글자를 공부할 것을 권유하였다.
1944년 6월부터는 동대문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학생들에게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처럼 조국에 충성을 다하도록 아이를 교육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본어 사용이 강제되고 있으나, 한국인이 한국어로 쓰고 읽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친구끼리는 한국어를 사용하자고 교육하였다. 또 『정감록(鄭鑑錄)』의 구절을 풀이하면서 일본 패망과 조국 독립이 멀지 않다고 주지시키기도 하였다. 『정감록』에 '삼융칠월 이화락(三隆七月 梨花落) 육대구월 해운개(六大九月 海雲開)'라는 구절이 있는데, 삼융칠월 이화락은 융희(隆熙) 3년 7월에 대한제국이 망한다는 주1 육대구월 해운개는 1945년 9월에 전쟁이 끝난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
1944년 10월에는 동아일보사 현상 모집에 당선된 현제명(玄濟明) 작곡 「조선의 노래」 중 “백두산에서 출발한 반도 삼천리 무궁화 화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사는 우리 이천만 동포 행복하다 그 이름 조선”이라는 가사를 부녀자들에게 읽어주며 애창하자고 하였다. 그녀는 한국의 국기를 그려 보여주면서 조선도 전에는 찬연한 독립국가였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44년 9월 30일 자택에서 검거되어 서대문경찰서로 끌려갔다. 1945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민족 의식 양양에 노력함으로서 국체 변혁의 목적으로서 행위한 자'라 적시되었다. 1998년 서울 강북구 수유동 자택에서 사망하였으며,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995년 3·1여성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