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정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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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한은 고려 전기에 서경천도 운동, 묘청의 난 등과 관련된 관리이다. 그는 본래 일관으로서 서경 분사의 검교소감이 되어 묘청을 스승으로 섬겼다. 음양비술을 내세워 서경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묘청과 함께 서경의 임원역 지역을 새로운 궁궐터로 제시하고 인종으로 하여금 그곳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김부식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백수한 (白壽翰)
백수한은 고려 전기에 서경천도 운동, 묘청의 난 등과 관련된 관리이다. 그는 본래 일관으로서 서경 분사의 검교소감이 되어 묘청을 스승으로 섬겼다. 음양비술을 내세워 서경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묘청과 함께 서경의 임원역 지역을 새로운 궁궐터로 제시하고 인종으로 하여금 그곳에 궁궐을 짓게 하였다. 서경천도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김부식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
고려 전기에, 참지정사, 상서우복야 서경유수사 겸 태자소부 등을 역임한 문신.
김정순 (金正純)
고려 전기에, 참지정사, 상서우복야 서경유수사 겸 태자소부 등을 역임한 문신.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묘청의 난 (妙淸의 亂)
묘청의 난은 1135년(인종 13), 묘청 등이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승려 묘청을 비롯하여 문신 정지상(鄭知常), 일자(日者)인 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일군의 세력이 당시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리 도참설을 근거로 삼아 개경에서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 금국정벌(金國征伐)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조정의 반대에 부딪치자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 등의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고려 중기에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한시.
송인 (送人)
고려 중기에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한시.
문공인은 고려 전기 호부원외랑,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자겸에 반대하고 묘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이었으나, 묘청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1116년(예종 11) 송나라 사행에서 귀국하면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고려에 전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문공인 (文公仁)
문공인은 고려 전기 호부원외랑,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이자겸에 반대하고 묘청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이었으나, 묘청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는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1116년(예종 11) 송나라 사행에서 귀국하면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고려에 전하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김부식은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075년(문종 29)에 태어나 1151년(의종 5)에 사망했다.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송의 서긍조차도 박학다식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묘청의 난 때 원수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을 지휘 통솔하여 난을 진압했다. 본인이 주도한 윤언이·한유충 등의 지방좌천 인사가 번복되자 정치보복을 염려하여 세 번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종의 명에 따라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김부식 (金富軾)
김부식은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075년(문종 29)에 태어나 1151년(의종 5)에 사망했다.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송의 서긍조차도 박학다식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묘청의 난 때 원수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을 지휘 통솔하여 난을 진압했다. 본인이 주도한 윤언이·한유충 등의 지방좌천 인사가 번복되자 정치보복을 염려하여 세 번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종의 명에 따라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대위(大爲)는 1135년(인종 13)에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킨 뒤 서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의 국호이다. 고려의 금에 대한 사대정책을 반대하던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선언한 국호이다. 연호는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금에 맞서는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대위국 (大爲國)
대위(大爲)는 1135년(인종 13)에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킨 뒤 서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의 국호이다. 고려의 금에 대한 사대정책을 반대하던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선언한 국호이다. 연호는 ‘천개(天開)’라고 하였다. 금에 맞서는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고려 후기에, 소모별감, 전리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정혼 (鄭渾)
고려 후기에, 소모별감, 전리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서경천도론은 고려 시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한 논의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고 칭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서경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이 서경천도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인종대에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성장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묘청과 정지상 등이 도참설에 기반하여 서경천도를 주도하였다. 고려 주변의 국제정세와 왕권의 위상을 둘러싼 국내정세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다. 서경천도는 평양이 고려의 확실한 영역이자 북방의 주요 거점으로서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서경천도론 (西京遷都論)
서경천도론은 고려 시기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한 논의이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고 칭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서경 세력을 기반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이 서경천도를 시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인종대에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성장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묘청과 정지상 등이 도참설에 기반하여 서경천도를 주도하였다. 고려 주변의 국제정세와 왕권의 위상을 둘러싼 국내정세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전개되었다. 서경천도는 평양이 고려의 확실한 영역이자 북방의 주요 거점으로서 개발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