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물산장려회"
검색결과 총 7건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를 결성하였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민족경제 자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
이덕환 (李德煥)
일제강점기 때, 신민회를 결성하였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민족경제 자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朝鮮物産奬勵運動)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
조선민흥회는 1926년 7월 8일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발기한 민족협동전선단체이다.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전진회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민족당주비회(民族黨籌備會)에 참여하면서 국내의 협동전선을 위한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발기하였다. 한국 내의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대한 열망과 해외민족유일당운동, 코민테른 노선 변화라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민족주의 좌파와 조선공산당 및 그 관련 단체가 참여하지 않은 제한된 규모의 협동전선이었기 때문에 발기인대회에서 신간회와 합치자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신간회에 흡수되었다.
조선민흥회 (朝鮮民興會)
조선민흥회는 1926년 7월 8일 서울청년회와 조선물산장려회가 중심이 되어 발기한 민족협동전선단체이다. 서울청년회의 사상단체인 전진회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민족당주비회(民族黨籌備會)에 참여하면서 국내의 협동전선을 위한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발기하였다. 한국 내의 민족협동전선 결성에 대한 열망과 해외민족유일당운동, 코민테른 노선 변화라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다수의 민족주의 좌파와 조선공산당 및 그 관련 단체가 참여하지 않은 제한된 규모의 협동전선이었기 때문에 발기인대회에서 신간회와 합치자는 의견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신간회에 흡수되었다.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83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23세에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 유학 중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한 후 일제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삼았다. 귀국 후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3·1운동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어린이대공원과 오두산통일전만대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조만식 (曺晩植)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1883년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23세에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 유학 중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한 후 일제에 대항하는 이념으로 삼았다. 귀국 후 오산학교의 교사와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3·1운동으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으며,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었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어린이대공원과 오두산통일전만대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특별재정위원,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신현모 (申鉉謨)
일제강점기 때, 조선물산장려회,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특별재정위원,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독립운동가.
김종선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 서울 천도교 홍제소년군 단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운동과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한 정치인·기업인이다.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세브란스의약품주식회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00년 출생으로,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후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대자산가이자 전라도 대지주가 되었다.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교육운동과 소년운동을 이끌었으며, 다양한 구제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산업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피살되었다.
김종선 (金鍾善)
김종선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 서울 천도교 홍제소년군 단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운동과 빈민구제활동에 참여한 정치인·기업인이다. 해방 이후 제헌국회의원, 세브란스의약품주식회사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1900년 출생으로, 일본에서 학업을 마친 후 조선식산신탁회사 부사장을 역임하며 대자산가이자 전라도 대지주가 되었다.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해 교육운동과 소년운동을 이끌었으며, 다양한 구제 활동을 벌였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 산업노동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피살되었다.
한영신은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 부회장 등을 맡은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경기도 인천부에서 태어났으며, 14세 때 평안북도 의주로 이주하였다. 30세 때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 1919년 6월 기독교계 장로교파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타 교파의 애국부인회와 통합해 대한애국부인회가 조직되자 부회장을 맡았으며, 군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외,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한영신 (韓永信)
한영신은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 부회장 등을 맡은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 경기도 인천부에서 태어났으며, 14세 때 평안북도 의주로 이주하였다. 30세 때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 1919년 6월 기독교계 장로교파 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 타 교파의 애국부인회와 통합해 대한애국부인회가 조직되자 부회장을 맡았으며, 군자금을 모금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 외,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