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화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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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함과 12지상이 출토된 화장무덤. 화장묘.
경주 화곡리 화장묘 (慶州 花谷里 火葬墓)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함과 12지상이 출토된 화장무덤. 화장묘.
도관은 고려시대에 점토를 물에 휘저어 잡것을 없애 기와처럼 구워서 만든 관이다. 도관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고 일본에서는 와관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1957년 충남 공주시에서 발굴된 도관이 유일하다. 정선된 바탕흙을 사용해 700℃ 정도에서 구웠고, 흑회색을 띠고 있다. 평면은 장방형인데 네 모서리를 죽인 원방형으로 간단한 목관과 같은 모양이다. 화장법이 크게 유행하였던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식 장례인 화장의 수용과 당시 묘제의 변천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장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도관 (陶棺)
도관은 고려시대에 점토를 물에 휘저어 잡것을 없애 기와처럼 구워서 만든 관이다. 도관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이고 일본에서는 와관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1957년 충남 공주시에서 발굴된 도관이 유일하다. 정선된 바탕흙을 사용해 700℃ 정도에서 구웠고, 흑회색을 띠고 있다. 평면은 장방형인데 네 모서리를 죽인 원방형으로 간단한 목관과 같은 모양이다. 화장법이 크게 유행하였던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식 장례인 화장의 수용과 당시 묘제의 변천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장례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뼈단지는 사람의 시체를 화장한 뒤 뼈를 추려 담아 땅에 매장할 때 사용하던 용기(容器)이다. 화장뼈를 땅에 매장하는 것은 장골(藏骨)이라고 하여 ‘장골용기’ 또는 ‘골호(骨壺)’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부장용 토기와 별차이가 없었는데 8세기경 화장뼈단지용으로 특별히 제작되었다. 점차 외용기가 커지고 모양은 둔중해지고 무늬는 쇠퇴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거의 소멸하고 대신 돌널에 화장인골을 매장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일제시대 경주 일대에서 많이 수습되었으나 학술적인 조사를 하지 못하였다. 최근 부여 지역의 화장묘가 발굴되면서 화장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뼈단지
뼈단지는 사람의 시체를 화장한 뒤 뼈를 추려 담아 땅에 매장할 때 사용하던 용기(容器)이다. 화장뼈를 땅에 매장하는 것은 장골(藏骨)이라고 하여 ‘장골용기’ 또는 ‘골호(骨壺)’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부장용 토기와 별차이가 없었는데 8세기경 화장뼈단지용으로 특별히 제작되었다. 점차 외용기가 커지고 모양은 둔중해지고 무늬는 쇠퇴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거의 소멸하고 대신 돌널에 화장인골을 매장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일제시대 경주 일대에서 많이 수습되었으나 학술적인 조사를 하지 못하였다. 최근 부여 지역의 화장묘가 발굴되면서 화장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돌방무덤·화장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부여 상금리 고분군 (扶餘 上錦里 古墳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돌방무덤·화장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경주 석장동 고분군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의 앞트기식 돌방무덤·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과거에 금장리고분군으로 알려진 것이었는데,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서쪽에 있는 고분군을 따로 석장동 고분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통일신라 시대 분묘, 고려·조선 시대 분묘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화장묘는 매우 특수한 매장 방식으로 이 묘에 묻힌 이들은 집단 구성원 중의 극히 일부이거나 불교와 관련이 깊은 인물들일 가능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묘제의 변천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매장문화를 구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경주 석장동 고분군 (慶州 錫杖洞 古墳群)
경주 석장동 고분군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통일신라의 앞트기식 돌방무덤·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과거에 금장리고분군으로 알려진 것이었는데, 행정 구역 개편으로 서쪽에 있는 고분군을 따로 석장동 고분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통일신라 시대 분묘, 고려·조선 시대 분묘 등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화장묘는 매우 특수한 매장 방식으로 이 묘에 묻힌 이들은 집단 구성원 중의 극히 일부이거나 불교와 관련이 깊은 인물들일 가능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묘제의 변천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매장문화를 구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