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리화장묘는 양잠사 신축을 위해 언덕을 포크레인으로 정지하던 중 장골기(藏骨器)가 들어있는 석함(石函)과 석함 내에 들어 있던 뚜껑과 항아리, 그리고 석함과 구덩이 사이에 들어 있던 흙으로 만든 12지상(十二支像)이 수습되었다.
이 화장묘는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석함 안에 뼈를 담은 장골기를 안치한 후 뚜껑돌을 덮은 구조이다. 석함의 형태는 횡타원형이고, 높이와 너비가 100㎝ 내외로 다른 화장묘의 석함보다 규모가 크다. 석함은 횡타원형 몸통과 횡타원형 뚜껑의 중앙부를 구유처럼 파서 만들었다. 몸통과 뚜껑 직경이 같아 아가리가 일치한다. 내용기인 뚜껑항아리〔有蓋壺〕는 석함의 형태와 비슷한 종타원형이다. 뚜껑은 보주모양꼭지〔寶珠形鈕〕를 붙였고, 아가리 가까이에 대칭되게끔 4곳에 긴네모모양〔長方形〕의 귀를 만들고, 귀 중심에 아래 위로 관통하도록 구멍을 뚫었다. 항아리는 몸통이 종으로 긴 형태이고, 바닥에 굽이 있다. 아가리 바로 아래에 서로 대칭되게 4곳에 뚜껑과 같은 형태 및 크기의 귀를 붙이고 귀의 중심에 아래위로 관통하는 구멍을 뚫었다. 뚜껑을 덮었을 때, 4개의 귀가 서로 합치하는 구조이다. 이 귀는 네 귀에 철끈을 끼워 유골을 담은 뚜껑과 몸통이 분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뚜껑과 항아리는 표면에 무늬가 새겨지지 않았다. 십이지상은 흙으로 만들었고, 높이가 12∼15㎝ 내외이다. 12지상은 9개체인데, 옷차림새는 모두 평상복이다.
화곡리화장묘의 석함은 8세기대 네모모양〔方形〕석함에서 9세기대 종모양〔鐘形〕석함으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뚜껑항아리는 표면에 문양이 장식되지 않았다. 표면에 문양이 장식되지 않은 점은 왕경 귀족 전용의 장골기로 사용한 연결고리뚜껑항아리가 처음 등장할 때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껴묻거리〔副葬品〕로 부장된 12지상은 9세기 전반대 12지의 모습을 밝힐 수 있는 자료이고, 불교와 12사상의 융합을 잘 보여준다.
화곡리화장묘는 통일신라 지배층이 불교의 사리용기사리용기와 안치방식을 모방하여 만든 화장묘의 초기 형식으로서 9세기대 신라 왕경 화장묘의 편년은 물론 불교식 장법과 12지사상이 결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12지상은 통일신라 왕릉의 둘레돌〔護石〕에 흔히 조각되어 있음을 통해서 볼 때, 12지상이 부장된 화곡리화장묘의 피장자는 신라 지배층의 일원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