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구어리고분군은 형산강의 지류인 남천 상류의 서쪽 구릉 일대에 위치하며, 해발 60∼70m의 야트막한 구릉 일대에 분포한다. 이곳은 경주에서 울산 방향으로 7번 국도를 따라 15㎞ 정도 가다보면, 외동읍을 지나 구역마을이 있고, 고분군은 이 구역마을 남쪽에 설상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은 구릉이 해당한다. 이 고분군은 2개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구어리고분군Ⅰ·구어리고분군Ⅱ의 2개로 구분된다. 이 고분군의 범위는 넓은 편인데, 정확한 면적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1998년에 구어리고분군이 위치한 능선에 주택이 조성되면서 고분들이 많이 훼손되었는데, 파괴되지 않은 구릉 일대를 대상으로 같은 해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덧널무덤〔木槨墓〕22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13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3기, 독무덤〔甕棺墓〕2기, 돌덧널무덤〔石槨墓〕2기, 조선시대 기와가마터 2기 등 45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덧널무덤은 그 수가 모두 22기로 구어리고분군 무덤 유형 중에서 가장 많다. 평면형태는 긴네모모양〔長方形〕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판재로 덧널을 조립하였다. 덧널무덤 중에는 각기 별개의 구덩이를 파서 하나는 주인공을 안치한 으뜸덧널〔主槨〕과 다른 하나는 껴묻거리〔副葬品〕를 넣기 위한 딸린덧널〔副槨〕로 한 이혈 으뜸·딸린덧널식〔異穴 主副槨式〕무덤이 2기 확인되었고, 나머지 20기는 주인공과 껴묻거리를 하나의 구덩이에 부장한 구조였다. 덧널무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제1호 덧널무덤은 이혈 으뜸·딸린덧널식으로서 주조괭이·덩이쇠〔鐵鋌〕, 고사리장식이 달린 쇠투겁창〔鐵矛〕등 100여 점의 철기가 부장되었다. 덧널무덤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조영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무덤구덩이가 4m 이하로 규모가 작은 중·소형 무덤이다. 무덤구덩이 내부에 나무로 덧널〔槨〕을 만든 후, 덧널 내부 바닥은 주검이 놓이는 가운데에는 잔자갈을 깔고, 양 가장자리에는 유물을 부장한 후, 덧널과 무덤구덩이 사이의 공간에 돌을 채우고, 덧널 위에도 돌을 얹은 구조이다. 이 돌무지덧널무덤은 덧널무덤의 뒤를 이어 나타나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유행하였다.
굴식돌방무덤은 천장과 벽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돌방의 평면형태는 네모모양과 횡장방형이 있고, 네모모양은 널길이 가운데 마련되었고, 횡장방형은 왼쪽에 마련되었다. 돌방 평면형태가 횡장방형 돌방은 시신을 놓은 주검받침〔屍床〕의 높이가 30㎝ 이상으로 높고, 2∼3차례의 추가 매장이 되었다. 돌방무덤의조영시기는 7세기 전반경으로 보인다.
덧널무덤과 돌무지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에서 둥근바닥짧은목항아리〔圓底短頸壺〕·화로모양토기·통모양그릇받침·컵모양토기 등의 토기류와 쇠도끼·큰칼·쇠낫·꺽쇠·주조괭이·덩이쇠·판갑옷〔板甲〕·경갑(頸甲) 등의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구어리고분군은 4세기에서 7세기 전반에 조성된 고분군으로서 덧널무덤·돌무지덧널무덤·굴식돌방무덤 등의 묘제가 확인되었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묘제의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덧널무덤은 그 규모가 크고, 갑옷·투구·쇠투겁창 등 다양한 무기와 무구류가 부장되었으나 돌무지덧널무덤에서는 토기와 농·공구류 등이 주종을 이뤄 껴묻거리 구성이 단순하다.
이 고분군에서 확인된 이혈 으뜸·딸린덧널식 덧널무덤은 동혈(同穴) 으뜸·딸린덧널식 덧널무덤보다 상위의 무덤유형임을 나타내는 자료로서 주목되었고, 최근 경주 시내의 월성로와 쪽샘고분군에서 확인된 신라 최고지배층 고분의 무덤유형과 동일하기 때문에 향후 신라의 지배구조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 또한 시기에 따라 이 고분군의 규모와 껴묻거리의 수량·종류에 변화가 뚜렷하여 신라 중앙세력의 성장에 따라 주변 세력이 쇠퇴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