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송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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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간은 조선시대에 간쟁 기관인 사간원의 수장으로 정3품 당상관직이다.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양사 혹은 대간으로 지칭되며 언론을 담당하였는데, 대사간은 최고 책임자로서 사간 이하의 간관들을 통솔하며 논의를 주도하거나 내부 이견을 조정하였다. 1506년(연산군12)애 사간원이 폐지될 당시 대사간직 역시 폐지되었으나 중종반정 직후 복구되었다.
대사간 (大司諫)
대사간은 조선시대에 간쟁 기관인 사간원의 수장으로 정3품 당상관직이다. 사간원은 사헌부와 함께 양사 혹은 대간으로 지칭되며 언론을 담당하였는데, 대사간은 최고 책임자로서 사간 이하의 간관들을 통솔하며 논의를 주도하거나 내부 이견을 조정하였다. 1506년(연산군12)애 사간원이 폐지될 당시 대사간직 역시 폐지되었으나 중종반정 직후 복구되었다.
대사헌은 조선시대, 언론기관 가운데 하나인 사헌부의 수장으로 종2품직이다. 사헌부는 신료들에 대한 감찰 및 탄핵, 국왕에 대한 간쟁, 경연 참석, 5품 이하의 서경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대사헌은 사헌부의 활동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용재총화』에서는 대사헌 이하 사헌부 관료들의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성종 대 이후로 당하관 이하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대사헌의 위상이 다소 축소되었다.
대사헌 (大司憲)
대사헌은 조선시대, 언론기관 가운데 하나인 사헌부의 수장으로 종2품직이다. 사헌부는 신료들에 대한 감찰 및 탄핵, 국왕에 대한 간쟁, 경연 참석, 5품 이하의 서경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였는데, 대사헌은 사헌부의 활동 전반을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용재총화』에서는 대사헌 이하 사헌부 관료들의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성종 대 이후로 당하관 이하 청요직들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대사헌의 위상이 다소 축소되었다.
부수찬은 조선시대,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종6품의 관직이다. 집현전과 홍문관의 다른 관원들처럼 경연 참여와 실록 편찬, 왕명 제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홍문관 설치 이후 홍문관이 언관화되면서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혁파, 1505년(연산군 11)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와 중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다.
부수찬 (副修撰)
부수찬은 조선시대,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종6품의 관직이다. 집현전과 홍문관의 다른 관원들처럼 경연 참여와 실록 편찬, 왕명 제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홍문관 설치 이후 홍문관이 언관화되면서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혁파, 1505년(연산군 11)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와 중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다.
부응교는 조선시대, 홍문관에 설치된 종4품의 관직이다. 집현전과 홍문관의 다른 관원들처럼 경연 참여와 실록 편찬, 왕명 제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응교직과 함께 국왕의 사명(辭命)을 제작하는 예문관 응교직을 겸대하였으며 그만큼 문장에 능해야 하였다. 1456년(세조 2)에 집현전 혁파, 1505년(연산군 11)에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와 중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다.
부응교 (副應敎)
부응교는 조선시대, 홍문관에 설치된 종4품의 관직이다. 집현전과 홍문관의 다른 관원들처럼 경연 참여와 실록 편찬, 왕명 제작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응교직과 함께 국왕의 사명(辭命)을 제작하는 예문관 응교직을 겸대하였으며 그만큼 문장에 능해야 하였다. 1456년(세조 2)에 집현전 혁파, 1505년(연산군 11)에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와 중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다.
수찬은 조선시대에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정6품의 관직이다. 경연, 실록 편찬, 왕명 제작 등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을 전달하는 등 시종신으로서도 활동하였다. 성종 대에는 경차관으로 차정되거나 부정 적발을 위해 지방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홍문관 설치 이후 홍문관이 언관화되어가며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혁파, 1505년(연산군 11)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와 중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다.
수찬 (修撰)
수찬은 조선시대에 집현전과 홍문관에 설치된 정6품의 관직이다. 경연, 실록 편찬, 왕명 제작 등에 참여하였으며, 왕명을 전달하는 등 시종신으로서도 활동하였다. 성종 대에는 경차관으로 차정되거나 부정 적발을 위해 지방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홍문관 설치 이후 홍문관이 언관화되어가며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 혁파, 1505년(연산군 11) 홍문관 혁파 당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성종 대와 중종 대에 다시 복구되었다.
수찬관은 조선시대에 춘추관 소속의 정3품 관직의 겸관이다. 조선시대에 춘추관 직제는 주요 관직을 중심으로 한 겸임사관제로 운영되었다. 『경국대전』에 수찬관은 정3품 당상관이 맡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보통 승정원의 여섯 승지와 홍문관의 부제학이 담당하였다. 다만 승지는 실록 부록의 편찬관 명단에는 빠져 있는데, 평상시 기사 사관만을 담당하고 실록 편찬 작업에는 빠졌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수찬관 (修撰官)
수찬관은 조선시대에 춘추관 소속의 정3품 관직의 겸관이다. 조선시대에 춘추관 직제는 주요 관직을 중심으로 한 겸임사관제로 운영되었다. 『경국대전』에 수찬관은 정3품 당상관이 맡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보통 승정원의 여섯 승지와 홍문관의 부제학이 담당하였다. 다만 승지는 실록 부록의 편찬관 명단에는 빠져 있는데, 평상시 기사 사관만을 담당하고 실록 편찬 작업에는 빠졌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우헌납은 조선시대에 국왕에게 간쟁하는 일을 맡은 간관 계열의 직제이다. 고려시대 간쟁을 담당하던 중서문하성의 낭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직제 변경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고 사간원이 독립기구로 개편될 때 좌 · 우헌납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460년(세조 6) 좌헌납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1463년(세조 9)에 헌납 1인이 재설치되면서 우헌납의 직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사간원에 정5품의 헌납1좌로 정리되었다.
우헌납 (右獻納)
우헌납은 조선시대에 국왕에게 간쟁하는 일을 맡은 간관 계열의 직제이다. 고려시대 간쟁을 담당하던 중서문하성의 낭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여러 차례의 직제 변경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고 사간원이 독립기구로 개편될 때 좌 · 우헌납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460년(세조 6) 좌헌납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1463년(세조 9)에 헌납 1인이 재설치되면서 우헌납의 직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사간원에 정5품의 헌납1좌로 정리되었다.
정수곤은 조선 성종 대의 사적(史籍)의 관리에 능하였던 문신 관료이다. 1472년(성종3) 식년시에 입격하였다. 문장에 능해 문한(文翰)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회에 자주 초빙되었다. 사적 관리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되었으며, 『소문총공집』의 어려운 부분을 주해할 때도 참여하였다.
정수곤 (丁壽崑)
정수곤은 조선 성종 대의 사적(史籍)의 관리에 능하였던 문신 관료이다. 1472년(성종3) 식년시에 입격하였다. 문장에 능해 문한(文翰)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회에 자주 초빙되었다. 사적 관리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되었으며, 『소문총공집』의 어려운 부분을 주해할 때도 참여하였다.
좌헌납은 조선시대, 국왕에 대한 간쟁을 맡은 간관 계열의 직제이다. 고려시대 간쟁을 담당하던 중서문하성의 낭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직제 변경이 여러 차례 이루어지는 가운데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고 사간원이 독립기구로 개편될 때 좌・우헌납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460년(세조 6)에 우헌납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1463년(세조 9)에 헌납 1인이 재설치되면서 우헌납의 직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사간원에 정5품의 헌납1좌로 정리되었다.
좌헌납 (左獻納)
좌헌납은 조선시대, 국왕에 대한 간쟁을 맡은 간관 계열의 직제이다. 고려시대 간쟁을 담당하던 중서문하성의 낭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직제 변경이 여러 차례 이루어지는 가운데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고 사간원이 독립기구로 개편될 때 좌・우헌납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1460년(세조 6)에 우헌납과 함께 혁파되었다가 1463년(세조 9)에 헌납 1인이 재설치되면서 우헌납의 직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사간원에 정5품의 헌납1좌로 정리되었다.
한훈은 조선 전기 언관으로 활동하다 화를 당한 문신 관료이다. 한확과 소혜왕후의 인척으로서 1494년(성종 25) 별시에 입격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사간원 정언에 제수된 뒤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당시 소릉 복위를 논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유배되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사형된 뒤 부관참시되었다.
한훈 (韓訓)
한훈은 조선 전기 언관으로 활동하다 화를 당한 문신 관료이다. 한확과 소혜왕후의 인척으로서 1494년(성종 25) 별시에 입격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사간원 정언에 제수된 뒤 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무오사화 당시 소릉 복위를 논한 것이 문제가 되어 유배되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사형된 뒤 부관참시되었다.
조선 전기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의 아들로 사면된 이후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이다. 기묘사화 이후 부친의 망명으로 추국령이 내려지자, 동생 김덕순과 함께 행적을 감추고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 신원(伸寃)된 뒤 집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등 많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552년(명종 7) 향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부친 김식이 도학에 있어서 조광조와 쌍벽을 이룰 만큼 명성이 높았는데, 그 역시 부친으로부터 도학에 대한 수준 높은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덕수 (金德秀)
조선 전기에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김식의 아들로 사면된 이후 후학 양성에 힘쓴 학자이다. 기묘사화 이후 부친의 망명으로 추국령이 내려지자, 동생 김덕순과 함께 행적을 감추고 지내다가, 1538년(중종 33) 신원(伸寃)된 뒤 집으로 돌아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 등 많은 명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1552년(명종 7) 향년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부친 김식이 도학에 있어서 조광조와 쌍벽을 이룰 만큼 명성이 높았는데, 그 역시 부친으로부터 도학에 대한 수준 높은 소양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