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양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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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시의 경계에 있는 북한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둘레 12.7km에 달하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고려시대의 중흥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 신라의 북한산성이었던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성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조선시대의 북한산성은 한양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1711년(숙종 37)에 축성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산성에는 성문 14개소, 장대 3개소, 행궁·성랑 143개소, 창고 8개소, 사찰 21개소, 누각 3개소, 교량 7개소, 못 26개소, 우물 99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산성 (北漢山城)
북한산성은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시의 경계에 있는 북한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둘레 12.7km에 달하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고려시대의 중흥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 신라의 북한산성이었던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아차산성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조선시대의 북한산성은 한양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1711년(숙종 37)에 축성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산성에는 성문 14개소, 장대 3개소, 행궁·성랑 143개소, 창고 8개소, 사찰 21개소, 누각 3개소, 교량 7개소, 못 26개소, 우물 99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천 설성산성(利川 雪城山城)은 설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6세기 후반에 축조한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성내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백제가 초축한 성을 신라가 개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조사 결과 한성기 백제의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축성 기법이나 성의 구조 등으로 볼 때 이 산성은 6~7세기 때 전형적인 신라 석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산성은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왕경과의 주요 교통로상에 있는 이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이천 설성산성 (利川 雪城山城)
이천 설성산성(利川 雪城山城)은 설성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6세기 후반에 축조한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성내에서 백제 토기가 다수 출토되어 백제가 초축한 성을 신라가 개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조사 결과 한성기 백제의 성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축성 기법이나 성의 구조 등으로 볼 때 이 산성은 6~7세기 때 전형적인 신라 석성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산성은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왕경과의 주요 교통로상에 있는 이천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성산산성(城山山城)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좡허시[庄河市]에 있는 둘레 3110m의 고구려 중대형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후성산산성과 함께 벽류하(碧流河)를 사이에 두고 요동의 방어선이 차단하지 못한 적군이 동남진하거나 요동반도 남단에 상륙한 적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형에 따라 성벽을 쌓아 서북쪽이 길게 튀어나와 있다. 성벽은 쐐기꼴 모양의 돌과 북꼴 모양의 돌을 맞물리게 쌓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축성술을 보여준다.
성산산성 (城山山城)
성산산성(城山山城)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좡허시[庄河市]에 있는 둘레 3110m의 고구려 중대형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후성산산성과 함께 벽류하(碧流河)를 사이에 두고 요동의 방어선이 차단하지 못한 적군이 동남진하거나 요동반도 남단에 상륙한 적이 북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형에 따라 성벽을 쌓아 서북쪽이 길게 튀어나와 있다. 성벽은 쐐기꼴 모양의 돌과 북꼴 모양의 돌을 맞물리게 쌓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축성술을 보여준다.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 남단에 있는 둘레 1km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발굴 조사 결과, 아차산성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적힌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 진평왕 대인 604년에 재설치된 신라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치소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차산성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한 아차성(阿且城), 고구려 온달 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아단성(阿旦城) 등으로 알려졌으나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아차산성 (阿且山城)
아차산성(阿且山城)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 남단에 있는 둘레 1km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발굴 조사 결과, 아차산성은 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었고,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적힌 명문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 진평왕 대인 604년에 재설치된 신라 북한산주(北漢山州)의 치소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차산성은 백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한 아차성(阿且城), 고구려 온달 장군이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아단성(阿旦城) 등으로 알려졌으나 이와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양주 대모산성(楊州 大母山城)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반 이후 임진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축조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이 산성은 연천 대전리산성과 함께 나당전쟁의 중요 격전지였던 매소성과 비교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과 관련 구조물, 집수지 등에서 여러 차례 산성을 개축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까지 산성을 지속적으로 활용했음이 밝혀졌다. 다만 일부 확인되는 백제 유구와 유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양주 대모산성 (楊州 大母山城)
양주 대모산성(楊州 大母山城)은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6세기 중반 이후 임진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축조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이 산성은 연천 대전리산성과 함께 나당전쟁의 중요 격전지였던 매소성과 비교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성벽과 관련 구조물, 집수지 등에서 여러 차례 산성을 개축한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출토된 유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까지 산성을 지속적으로 활용했음이 밝혀졌다. 다만 일부 확인되는 백제 유구와 유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계속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서울 양천 고성지는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쌓은 둘레 380m 가량의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산성은 한강변에 접한 얕은 구릉인 궁산(해발 74.3m) 정상부를 둘러싸고 축조되었는데, 일제강점기와 근대에 군 기지로 사용되면서 유적이 많이 훼손되었다. 당초 삼국시대의 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축조 기법이나 성벽을 조성할 당시의 토층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 그리고 출토 토기 및 기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신라가 쌓은 성이 분명하다.
서울 양천 고성지 (서울 陽川 古城址)
서울 양천 고성지는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6세기 중반 이후에 쌓은 둘레 380m 가량의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산성은 한강변에 접한 얕은 구릉인 궁산(해발 74.3m) 정상부를 둘러싸고 축조되었는데, 일제강점기와 근대에 군 기지로 사용되면서 유적이 많이 훼손되었다. 당초 삼국시대의 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발굴 조사 결과 성벽의 축조 기법이나 성벽을 조성할 당시의 토층에서 수습된 목탄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값, 그리고 출토 토기 및 기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신라가 쌓은 성이 분명하다.
청주 정북동 토성은 국가 사적으로,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평면 형태 방형의 판축 토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75m이다. 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인근의 평야에 조성되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토성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정북동 토성에 대한 그간 몇 차례의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성벽에 대한 절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토성의 축조 시기와 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현재 해자에 대한 발굴 조사가 완료되어 복원되었다.
청주 정북동 토성 (淸州 井北洞 土城)
청주 정북동 토성은 국가 사적으로,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평면 형태 방형의 판축 토성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75m이다. 토성은 미호천과 무심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인근의 평야에 조성되었는데, 현존하는 우리나라 토성 가운데서도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예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정북동 토성에 대한 그간 몇 차례의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성벽에 대한 절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토성의 축조 시기와 세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논란이 있다. 현재 해자에 대한 발굴 조사가 완료되어 복원되었다.
충주 장미산성은 국가 사적으로,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둘레 294m 가량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충주 장미산성은 남한강의 수로와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육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백제의 조족문 토기가 출토되었고, 충주가 삼국의 각축지였다는 점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현재의 석축 성벽의 축조 기법과 구조를 살펴보았을 때 6세기 중반 충주로 진출한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충주 장미산성 (忠州 薔薇山城)
충주 장미산성은 국가 사적으로,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둘레 294m 가량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충주 장미산성은 남한강의 수로와 한강 유역으로 통하는 육로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다. 백제의 조족문 토기가 출토되었고, 충주가 삼국의 각축지였다는 점에서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하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현재의 석축 성벽의 축조 기법과 구조를 살펴보았을 때 6세기 중반 충주로 진출한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고양 행주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이다. 권율 장군을 비롯한 의병과 승병 2천 3백여 명이 왜군 3만여 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이끌었던 역사적 현장으로, 당시 전투에서 아낙네들이 긴치마(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옮겨 싸움을 거들었다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7~8세기에 축조된 토성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발굴 조사에서는 7세기 전중반에 석축 성벽이 축조된 이후 12~13세기경 토성이 축조되었고, 다시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축 성벽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고양 행주산성 (高陽 幸州山城)
고양 행주산성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난 곳이다. 권율 장군을 비롯한 의병과 승병 2천 3백여 명이 왜군 3만여 명과 맞서 싸워 승리를 이끌었던 역사적 현장으로, 당시 전투에서 아낙네들이 긴치마(행주치마)를 이용해 돌을 옮겨 싸움을 거들었다는 일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7~8세기에 축조된 토성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발굴 조사에서는 7세기 전중반에 석축 성벽이 축조된 이후 12~13세기경 토성이 축조되었고, 다시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축 성벽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황룡산성(黃龍山城)은 평안남도 남포특별시 용강군 오석산에 있는 고구려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성내에서 고구려 기와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산성 안에 고구려의 행정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에서 서쪽으로 44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산성에서는 남포와 서해까지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황룡산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으로 향하는 수로와 육로 교통로를 모두 통제하던 지방의 거점성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는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37호이다.
황룡산성 (黃龍山城)
황룡산성(黃龍山城)은 평안남도 남포특별시 용강군 오석산에 있는 고구려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성내에서 고구려 기와가 다량으로 발견되어 산성 안에 고구려의 행정 관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에서 서쪽으로 44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이 산성에서는 남포와 서해까지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황룡산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으로 향하는 수로와 육로 교통로를 모두 통제하던 지방의 거점성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는 북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급 제37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