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전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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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식은 해방 이후 서울복음교회 담임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한 목회자 및 신학자이다. 1940년 일본신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대 성서학자들과 복음동지회를 결성해 1961년 『마태의 복음서』를 출판하였다. 서울복음교회에 교계의 목회자와 신학교 교수들을 초청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을 역임하는 등 에큐메니즘을 실천하였고,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한국 기독교계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서구의 첨단 신학을 비판적으로 소개했는데, 특히 한국 칼 바르트 신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동식 (池東植)
지동식은 해방 이후 서울복음교회 담임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 등을 역임한 목회자 및 신학자이다. 1940년 일본신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대 성서학자들과 복음동지회를 결성해 1961년 『마태의 복음서』를 출판하였다. 서울복음교회에 교계의 목회자와 신학교 교수들을 초청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을 역임하는 등 에큐메니즘을 실천하였고,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한국 기독교계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서구의 첨단 신학을 비판적으로 소개했는데, 특히 한국 칼 바르트 신학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상현은 일제강점기, 감리교회 목사이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의 1세대 지도자이다. 주로 종로 기독교 청년회와 여러 감리교회에서 설교하였으며, 『동아일보』와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학술지인 『신학세계』에 글을 기고하였다. 1937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을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단을 옮겨 돈암정 교회를 개척하는 등 그리스도의 교회 1세대 목회자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최상현 (崔相鉉)
최상현은 일제강점기, 감리교회 목사이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Christian Church)의 1세대 지도자이다. 주로 종로 기독교 청년회와 여러 감리교회에서 설교하였으며, 『동아일보』와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학술지인 『신학세계』에 글을 기고하였다. 1937년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還元運動)을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교단을 옮겨 돈암정 교회를 개척하는 등 그리스도의 교회 1세대 목회자로 활약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청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기도 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최태용은 1935년에 조선의 독자적인 교단인 기독교 조선 복음 교회를 설립하고, 해방 이후 독립촉성 국민회 연락부장, 대한농회 부회장, 대한농민회 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을 역임한 개신교 목사이다. 무교회주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교회주의와 영적 기독교론 등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 신앙 혁명을 부르짖으며 개신교회를 각성하려다가 조선 교계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훗날 우치무라의 사상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였고, 1935년 복음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후 정치·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
최태용 (崔泰瑢)
최태용은 1935년에 조선의 독자적인 교단인 기독교 조선 복음 교회를 설립하고, 해방 이후 독립촉성 국민회 연락부장, 대한농회 부회장, 대한농민회 회장, 국민훈련원 원장을 역임한 개신교 목사이다. 무교회주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을 받았지만, 비교회주의와 영적 기독교론 등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 신앙 혁명을 부르짖으며 개신교회를 각성하려다가 조선 교계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훗날 우치무라의 사상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였고, 1935년 복음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후 정치·사회 운동에 투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