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

의생활
물품
학교(學校)에 입학한 학생이 입도록 만든 제복(制服).
이칭
이칭
학생복
물품
재질
면직물|모직물|혼방직물
용도
학생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지
관련 의례
입학식|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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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교복은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입도록 만든 제복이다. 갑오개혁으로 신분 막론하고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학생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근대적 의미의 교복이 탄생하였다. 교복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군부정권기, 민주화시대를 거치면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정부 또는 학교장 재량으로 제정되고, 폐지되고, 다시 권장되면서, 민족 의식이 표현되거나 말살되기도 하고, 평준화, 획일성, 균일성, 통제가 강조되거나, 강제적 자율화가 진행되기도 했으며, 자부심, 소속감, 엘리트 의식이 드러나거나, 다양성과 개성, 실용성과 편안함이 추구되기도 하였다.

정의
학교(學校)에 입학한 학생이 입도록 만든 제복(制服).
1. 연원

서양에서 교복은 13세기 초 영국 수도원 학생들이 착용한 카파클로자(cappa clausa)나 16세기 중반 영국의 자선 학교(charity school)가 가난한 학생들에게 지급한 블루 코트(blue coat)가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군복형 교복의 경우, 프랑스 나폴레옹이 유사시 학생들을 군인으로 활용하기 위해 군사 훈련을 시키면서 통일된 교복을 입힌 것을 최초로 보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교복의 시원(始原)은 조선시대 태종 3년(1441)에 성균관과 5부 학당의 유생(儒生)이 학생복(學生服)으로 청금(靑衿)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사대부가의 자제들로 한정된 유생은 조선 초기에 푸른색 바탕에 검은 선 장식을 한 난삼(襴衫)을 착용하다가, 조선 후기에는 유건(儒巾)도포(道袍)를 착용하였다.

2. 변천 및 현황

2.1. 근대 교복의 도입과 변화

서세동점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에 선교계 또는 민족 선각자가 근대 학교를 설립하면서 신분과 계급적 속박에서 탈피한 새로운 개념의 교복이 등장하였다. 최초의 근대 교복은 이화학당 설립 초기(1886년)의 붉은색 면 치마저고리로, 학당 설립 초기 입당 의사를 밝힌 부모 없는 고아나 가세가 빈한한 서민 계층의 어린 학생에게 지어 입힌 옷이다. 이 붉은 옷을 입은 여학생들은 ‘홍둥이’로 불리며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당시 관복 색이었던 홍색을 침범한 것으로 인식되어 양반 사회에서 반발이 있었다.

갑오개혁과 1895년 2월 2일 반포된 국가의 운명과 교육이 직결된다는 인식이 담긴 ‘교육 입국 조서’로 모든 사람은 능력에 따라 학교에 진학하여 학생이 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 배재학당에서 최초로 양복식 교복과 교모를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모자에는 태극을 상징하는 둥근 모양의 청홍색 선을 둘렀다. 1896년에 단발령이 반포되었지만 1900년 개교한 관립중학교에서는 아직 상투를 튼 학생들이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관립중학교가 1906년 관립한성고등학교로 개칭되었을 무렵 검은 학생모(學生帽)가 생겼고, 모자에 ‘한성’이라고 쓴 모표도 붙이게 되었다. 순헌황귀비의 지원으로 1906년 설립된 명신여학교(이후 숙명고등여학교)에서는 1907년 자주색 서지(serge)로 만든 원피스, 보닛(bonnet), 그리고 구두로 구성된 양장 여자 교복을 선보였다. 1908년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설립된 최초의 여성 공교육 기관인 관립한성고등여학교(이후 경기여자고등학교)에서는 흰 저고리(겨울에는 검은 저고리)에 검은 통치마 차림을 교복으로 지정하였고, 외출할 때 내외용 쓰개치마나 장옷을 금지하고 검은 우산을 대신 사용하도록 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한 국권 피탈(國權被奪) 후, 1911년 반포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서는 한성을 경성(京城)으로 개칭하고, 대학을 설치하지 않고, 고등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강등하는 등 열등한 학제가 마련되어 한국인은 일본인과 차별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 공립학교 교사들은 제복을 입고 칼을 차서 일본 군국주의 통치의 위력을 과시했다. 1910년대 남학생은 교복으로 한복 두루마기를 주로 착용하였고, 지정된 모자를 쓰고 다녔다. 교복에 학교를 상징하는 단추, 교표 등이 추가되기 시작했는데, 1911년경 경신학교(1886년 개교)에서는 두루마기 고름을 개량하여 고름 대신 학교를 상징하는 단추를 달았다. 숙명고등여학교(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의 교복은 민족주의의 발로로 양복 교복에서 한복 교복(흰 저고리와 자주색 치마)으로 바뀌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의 영향으로 그해 8월, 공립학교 교사들의 제복과 패검이 폐지되었다. 1922년 2월 반포된 제2차 「조선교육령」 이후 3.1 운동의 주역이었던 고등보통학교 남학생들에게 일본식 학생복인 가쿠란(学蘭)이 도입되었다. 이 검은 제복은 옷감의 색깔과 종류, 주머니와 단추의 개수와 위치, 휘장 등에 대해서 자세히 규정되었을 뿐 아니라, 신발, 안경, 모자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규정이 있었다. 교복은 외출할 때도 입어야 했다. 딱딱한 세운 깃[詰襟, つめえり] 양식의 교복은 규율과 질서뿐 아니라 권위와 엘리트의 자부심을 상징하였다. 일제는 일본식 교복을 도입하면서 학생들을 식민지 체제에 동화시키고자 했다.

식민지 시기에 설립된 유일한 대학 기관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의 교복은 일본의 제국 대학 양식을 따랐으며, 고등보통학교 교복과 대체로 같았지만, 모자와 모표, 단추, 금장에서 구분되었다. 고등보통학교 학생모는 둥근모[丸帽]로 백선의 숫자와 굵기로 제1고보(경성), 제2고보(평양) 등을 구분하였으며, 모표로 고(高)자를, 교복 단추는 학교 특정의 것, 금장에는 학년을 표시하는 로마 숫자 또는 아라비아 숫자를 달았다. 대학의 교복 학생모는 사각모[角帽]로 모자에 대학(大學)을 형상화한 모표를 달았고, 금장으로 자신의 소속 학부를 나타내는 알파벳 배지를 달았다. 일본식 교복은 학생들을 기존 사회 계층에서 분리시키면서 새로운 계층을 대변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에 반영된 일제의 교육 정책은 한국인의 교육을 일본의 교육과 같은 수준으로 높여 놓은 듯이 보였지만 사실은 일제 식민지 정책에 순종하는 계층만이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 체계로의 개편이었다.

보통학교에서는 학교장 재량으로 검정 두루마기에 학생모를 교복으로 제정하였으며, 여학생 교복은 흰 저고리 검정 통치마로 통일되었다. 여학교들은 학교 특유의 개성과 표지를 치마 끝단에 흰 줄을 물결무늬로 넣거나, 주름의 크기, 형태, 옷감으로 변화를 모색하였다. 여성에게도 체육 교육이 시작되면서 활동이 편하도록 교복 치마에 어깨허리를 다는 것이 보편화되었고, 저고리도 길어졌다. 이 무렵 치마 길이가 점점 짧아지자 이화여학교를 위시하여 여학교마다 치마 길이를 무릎에서 발목 길이의 1/3로 규정하였다. 1930년대 들어 일본 고등여학교 교복 양식인 감색 세일러복[세라복, セーラー服]에 주름치마 교복이 도입되고, 겨울에 스웨터를 짜 입는 여학교들이 생겨났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학생들을 황국 신민(皇國臣民)화 시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1938년 3월 3일 제3차 「조선교육령」을 반포하였다. 전시 총동원 체제에서 남학생의 교복은 유사(類似) 군복 형태로 변하였다. 경기도 내 공 · 사립 중등학교의 제복은 1939년 동복부터 처음으로 국방색으로 통일되었다. 학생들은 국방색 교복과 각반을 차고 전투모 형태의 교모를 착용하였다. 1942년 신학기부터는 전국 35만여 중학생의 제복이 국방색 국민복은 을호 형태로, 모자는 전투모로 통일되었다. 한복 교복 위주이던 여학생 교복은 1938년 2학기부터 모두 양복형으로, 머리는 단발로 결정되었다. 여자 공립 중등생의 교복은 곤색 서지 소재로 세라복에 커프스를 달아 활동성을 높였고, 치마에는 주름을 없앴다. 일부 여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왜바지를 교복으로 착용하게 하였다. 당시 민족 여대의 상징이었던 이화여전에서도 1939년 새 학기부터 한복 교복이 폐지되고 양복 교복으로 바뀌었다.

1945년 광복 후 남학생 교복에서는 카키색, 전투모, 각반이 사라지고, 남학생은 다시 학생복의 전형인 검은 제복을 입었다. 여학생 교복으로는 감색 플레어스커트에 하얀 윙 또는 숄 칼라가 덧대어진 교복이, 남학생 하복으로는 회색 바지에 흰색 또는 파란 셔츠가, 여학생 하복으로 흰색 윙 칼라 셔츠가 학교장 재량으로 채택되었다. 학생과 성인을 구별하기 위한 두발 단속(스포츠형 머리와 단발머리)이 지속되었다. 일률적인 교복이었지만 창덕여자고등학교의 베레모나, 서울고등학교의 회갈색 하복 등 학교마다 특성과 개성을 살린 교복이 등장하기도 했다. 대학교에서도 일본 제국 대학 양식의 검은 제복을 폐지하고 영미권 해군 제복 스타일 등을 차용한 새로운 교복이 제정되었다. 6.25 전쟁 시기 대학에서는 중고등학교 교복을 그대로 착용하고, 교모만 착용하거나 군복을 검게 물들여 입고 다니기도 했다. 1955년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할 무렵 감색 다운 칼라(down collar)의 대학교 특유의 교복이 등장하였다. 당시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을 상징하고, 엘리트임을 입증한 교복은 1960년 4.19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사복(私服)으로 인한 사치를 없애고 청신한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남녀 각 대학생은 반드시 배지를 달고, 야간 대학생도 교복, 교모를 착용하게 하였다. 대학생뿐 아니라 초 · 중 · 고등학교 학생들의 복장 개선도 단행하였다. 여중고생 교복을 치마로 통일하고, 바지를 엄금하게 하였다. 교복을 따로 정하지 않은 초등학교에서는 두발 단속이 실시되었다. 중학교 의무 교육 실시의 기반이 된 1968년 실시된 문교부의 ‘중학교 평준화 시책’은 중학교 교복의 교복, 교모와 모표를 시도별로 획일화하는 것으로 상징화되었다. 1976년에는 사립 국민학교의 사치성을 없애기 위해 사립 학교의 교복을 금지하였다.

2.2. 현대 교복의 변화

1977년 5월부터 문교부에서는 중 · 고교생 교모와 교복 폐지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교복은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국제 대회(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를 앞둔 개방과 자율을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1982년 두발 자율화가 시작되었으며, 1983년 신학기부터 모든 학교에서 획일화된 교복 지정을 금지하였다. 이는 정치적 정책이었지만, 복장 자율화로 길러지는 자율 의식을 통해 민주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교복 자율화 조치로 학교에서 교복이 사라지자 주니어 패션 부문의 기성복 산업이 활성화되었다. 반면, 교복 맞춤집들은 실업, 도산의 불안감에 고심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원하는 사복을 구입하는 비용이 높아져 학부모의 반발도 대두하였다. 1985년 10월 문교부는 교복 자율화 보완 조치를 발표하여, 1986년 2학기부터 교복 착용을 허용하였다. 1990년 1월에는 자유복제를 채택한 중고등학교에 대해 다시 교복을 입도록 적극 권장하는 방침을 정하였다. 교복 자율화 조치 이후 새롭게 도입된 교복은 학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개성 있고, 밝은 색상의 다양한 교복이 주를 이루었다.

1998년 3월 기준 전국 중 · 고등학교의 95.5%가 교복을 착용하게 되면서 연간 3,500~4,000억 원(1997년 기준)으로 교복 시장이 커졌다. 대기업이 교복 시장에 참가하면서 ‘브랜드 교복’이 등장했고, 교복업계에서는 청소년의 취향을 활용하여 비싼 정장 같은 남학생 교복과 귀엽고 세련된 여학생 교복 디자인으로 학생들의 환상을 자극하였다. 교복은 학생 신분을 나타내고 평등함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기보다는 선호하는 스타일에 따라 디테일이 달라지며 유행을 반영하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패션 아이템으로 변화하였다. 교복을 거부하던 대학생들마저 단체로 점퍼를 맞추어 입고 다니며 해당 대학, 학과, 출신 고교를 선명하게 새겨 입기 시작하였다.

자율 교복이 빈부 격차를 키운다는 위기 의식에서 2000년대 말부터 교복값을 줄이는 대안으로 교복 공동 구매가 등장하였다. 시 · 도 내 중소업체가 연합하여 교복 개발 및 생산을 담당하고 교복비의 절반 또는 전부를 지방 정부에서 지원한다는 ‘반값 교복’, ‘무상 교복’ 정책과 각 시 · 도 교육청별로 중 · 고등학교 교복 디자인을 10~20여개로 표준화해 판매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복 표준 디자인제(공정거래위원회 제안, 2016년 2월)가 추진되었다.

이 제도는 ‘편안한 교복’ 정책으로 진화했다. 서울시 교육청을 비롯한 각 시 · 도 교육청에서는 2019년 경부터 교복 자율화와 두발 자율화를 실시하고, 2020년도 1학기부터는 ‘편안한 교복’ 정책을 시행하여 학교마다 학생, 학부모, 교직원의 공론화를 거쳐 새로운 개념의 교복을 도입하였다. 이를 신교복 또는 생활복형 교복이라 부른다. 2019년 말 세계를 휩쓴 코로나 19로 약 2년 동안 온라인 수업으로 학업을 이어온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편안한 교복으로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교복의 도입 분위기 속에 2020년 정부에서는 ‘한복교복’ 보급 사업을 통해 학생들이 일상에서 한복을 입는 경험을 하면서 민족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3. 형태와 제작 방식

교복은 학생 신분과 소속감, 유대감을 표현하며, 학교를 대표하는 학생 공식 의복의 역할을 하므로 형태, 의복 재료, 색채를 통일시켜 각 학교에 맞는 상징성과 신분에 맞는 아름다움을 나타내도록 디자인한다.

근대 교육 개념이 도입된 20세기 초 한국 교복의 형태는 남학생의 경우 검은 두루마기와 학생모, 여학생은 통치마와 저고리라 할 수 있다. 학생모를 제외하고, 대부분 가정에서 직접 만들 수 있는 품목이었다. 일제의 국권 피탈 후, 1920년대부터 일본식 교복이 도입되었다. 학생복으로 지정된 가쿠란은 지정 공급업체에서 맞춰 입거나 대량 생산된 옷을 사 입었다. 맞춤 교복의 경우 값이 비쌌기 때문에 월부로 교복값을 낼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 여학생 교복이 한복식에서 서양식으로 변화된 것은 1938년 전시 총동원 체제로 전환되면서부터로,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일본식 세일러복과 바지가 도입되었다. 교복의 양복화와 여학생의 바지 착용은 서양복 착용 습관 도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복은 일본식 교복에서 벗어나 한국식 교복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는 변곡점이 되었으나, 근대적 학생복으로 확고하게 인식된 검은 제복 형태를 쉽게 바꾸지는 못하였다. 1961년 등장한 군부 정권의 1968년 중학교 평준화 정책과 학교 병영화 조치는 검은 제복의 획일화를 강화시켰다. 대신 여학생 교복 형태는 다양하게 변하였다. 교복은 맞춤과 대량 생산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방법으로 제작되어 지정 공급업체에서 판매되었다.

1980년대 초 교복 자율화 조치로 교복이 한국 사회에서 사라지자 일본식 교복은 자취를 감추었다. 1990년대 다시 교복이 등장할 때에 교복은 자유와 멋이 느껴지는 다양한 색감과 패턴의 블레이저 자켓형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교복 제작은 그동안 중소업체들의 몫이었으나, 기성복 대량 생산 체제를 확립한 대기업이 교복 시장에 뛰어들어 연예인과 아이돌을 통해 교복을 홍보하고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교복을 선보이자 기존 교복업체들이 도산하거나 하청업체로 전락하였다. 이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교복 공동 구매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기업의 교복 산업 진출이 제한되었고, 교복 물려주기 운동이 추진되었다.

2020년부터 도입된 편안한 교복은 치마 강요가 여학생 인권 침해와 남녀 차별이라는 인식에 따라 남녀 모두 동일하게 교복 바지와 체육복 바지로 바뀌었다. 활동성이 떨어지는 기존 교복에 대한 대안으로 와이셔츠 대신 신축성 있는 원단의 맨투맨, 폴로 티셔츠와 자켓 대신 후드 집업티, 야구 잠바가 채택되었다.

4. 관련 풍속

교복 규정이 엄격하면 할수록 학생들은 획일적인 교복 틀 안에서 개성을 조금이라도 드러내기 위해 한정된 교복 안에서 알게 모르게 멋을 부렸다. 학생모에 신문지를 말아 넣어 각을 세우고, 교복 바지를 당시 유행에 따라 나팔바지로 만들고, 검은 스타킹을 살이 좀 더 비치는 얇은 것으로 바꾸고, 교복을 몸에 딱 맞도록 줄여 입기도 했다. 졸업식에서의 학생모 던지기와 교복 찢기, 회칠(灰漆)하기는 해방감을 표현한 행동이다.

참고문헌

원전

『朝鮮王朝實錄』

단행본

변경희·아이다 웡 외, 『패션, 근대를 만나다』(사회평론아카데미, 2022)
유수경, 『韓國女性洋裝變遷史』(一志社, 1990)
Brunsma, D. L, 『The school uniform movement and what it tells us about American education: A symbolic crusade』(Rowman&Littlefield Pub Inc, 2004)

논문

이민정, 「복식과 이데올로기-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정권기를 중심으로-」(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이민정·이경미·이민선, 「한국 대학 교복 변천에 대한 연구-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服飾』 70-2, 한국복식학회, 2020)
정무용, 「1980년대 중 · 고등학생 ‘교복 자율화’ 조치의 시행」(『역사비평』 135, 역사비평사, 2021)
정은숙·서동애·이영화, 「교복 브랜드화 시대의 여학생 교복 디자인에 관한 연구」(『服飾』 57-6, 한국복식학회, 2007)
최수아, 「경기도 중·고등학생 교복 표준 디자인을 위한 연구」(『한국패션디자인학회지』 15-2, 한국패션디자인학회, 2015)

인터넷 자료

"교복", "학교", "학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교복"(두산백과사전)
“교복”(국립민속박물관, 2017)
"교복과 과외"(국가기록원)
"학생 신분의 표지, 교복"(국가기록원)
“교복으로 재탄생한 한복 “예쁜데 편하기까지”"(행복한 교육, 2021)
“신교복”(선농단, 2021)
“우리가 입을 옷, 우리가 정해요”(전남교육소식, 2021)

기타 자료

학생제복흑색실행(동아일보, 1922. 6. 28.)
신입 중학생에게 국방색의 제복(동아일보, 1939. 3. 23.)
남녀중등생의 제복(매일신보, 1942. 3. 19.)
대학생과 교복(동아일보, 1965. 2. 23.)
중학생 교복 다양하게(동아일보, 1978. 9. 1.)
경기80년(중앙일보, 1980. 11. 4.)
사진으로 본 교복 백년(경향신문, 1983. 3. 2.)
문교부, 교복착용 적극권장(경향신문, 1990. 1. 15.)
제일모직, 학생복 사업 중소기업에 이양. 중소업체 육성차원(한국경제, 1997. 4. 9.)
서울 중고교 교복공론화…무명치마부터 후드티까지, 교복 변천사(연합뉴스, 2019.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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