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생활개선법」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국가 비상사태를 맞이한 정부가 국민의 생활을 전시에 적합한 내핍 생활로 통제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주요 내용은 전시생활위원회의 설치(제2조), 음식점에서 5시 이전 탁주를 제외한 주류 판매 금지(제3조), 음식점에서 접객만을 주로 하는 부녀자 사용 금지(제5조), 전시에 상응하지 않는 복장의 제한 또는 금지(제7조), 사치품의 수입, 제조 또는 판매 금지(제8조) 등이다. 부산 피난 정부 시절인 1951년 11월 18일에 제정 공포되어 1963년 11월 5일에 폐지되었다.
전시 또는 사변(事變)에 있어서 국민 생활을 혁신하고 간소화하여 전시에 상응하는 국민정신의 앙양(昻揚)을 목적으로 한다(「전시생활개선법」 제1조).
1951년 11월 18일에 국회의 결의로 확정되어 법률 제225호로 제정, 공포되었다. 총 전문 14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생활개선법」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국민 생활의 합리화와 간소화’를 위해 전개되었던 ‘신생활운동’에서 기인한다. 경제 악화와 민생고에도 불구하고 사치 풍조가 심화되자 1950년 정부 주도의 국민 생활 개선 실천 운동으로 확장되고 강화되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국가의 운명이 위중해진 상황으로 모든 면에서 총력전 수행에 적합한 국민 생활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1951년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남한 대부분의 지역이 전장이 되지 않아 전쟁에 대한 체감도가 급격하게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휴전 회담은 곧 전쟁이 끝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조성하여 전시 생활 체제를 뒤흔드는 데 일조하였다. 전선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후방에서는 사치 생활과 이완된 생활 방식이 고착되고 있었다. 1951년 8월의 당시 물가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전쟁 발발 직전보다 8.8배 상승해 있었다. 이에 당시 국무총리이자 사회부 장관인 허정은 1951년 4월 국민의 전시 생활 확립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8월 사회부는 차관회의에서 「전시국민생활 실천요강」을 제안하였다. 국회 사회 보건 위원회는 ‘법제화’의 관점에서 전시 생활 개선의 문제에 접근하여 「전시국민생활개선법」을 발의하였다.
「전시생활개선법」의 공포에 따라 1952년 1월 첫 국무회의의 의결로 ‘전시 생활 개선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 위원회를 사회부 산하에 두고 사회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였다. 도의(道義), 의례(儀禮), 의복(義服), 음식(飮食), 주택(住宅), 감시(監視)의 6개 분과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의복 분과 위원회에서는 남녀 국민에 대해 사치품을 금할 것과, 장려할 의장(衣裝) 종류를 결정하였다.
전국 각 중요 도시의 음식점을 대폭 축소하고, 사치품의 수입, 제조, 판매를 금하며,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극장의 주간 개관을 금하고, 매월 1일을 ‘국민 정신 생활 개선일’로 운영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사회부와 공보처가 공조하여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전시 국민 생활 촉진 주간’을 운영하며 강력한 ‘선전 계몽전’을 전개하였다.
외국산 양단, 벨벳, 하부다에 등으로 된 의류 착용을 금지하며 사치품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전시생활개선법」 제9조의 규정에 의한 복장과 사치품 지정의 건’을 근간으로 하였다. 외국산 복지와 모자, 양산, 핸드백, 외국산 화장품, 주류, 음료수, 과자, 청과물, 외국산 담배, 궐련 용품, 완구, 14K 이상의 귀금속 등의 착용 · 판매 · 수입을 일절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가해질 수 있는 처벌에 대해 규정하였다. 설령 규제 대상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현재 가지고 있는 의복에 대해서는 그 착용을 허용하였다.
법안의 시행은 혼란과 저항에 직면하였다. 법안에서 규정한 전시에 상응하지 아니하는 복장이나 사치품에 해당하는 물품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물품의 경우 과거부터 소장하던 것까지도 착용이 금지되는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해 줄 시행 세칙이 부재(不在)한 가운데 집행 현장에서 무차별적으로 법률이 적용되었다. 이에 1952년 정부는 국민 생활을 실질적으로 전시 체제화할 세부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에 착수하였고 국무회의에서 시행령과 시행 세칙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무회의의 의장인 이승만은 국민의 개인적인 생활에 관한 사항에 관권을 발동시켜 위반자를 처벌하는 방법보다 국민 운동에 호소하여 자숙자계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고, 최종 결재를 거부하였다. 이에 시행령은 공포와 시행에 이르지 못하였다.
시행령의 제정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정부는 강조 주간을 별도 설정하여 운영하는 등의 방법으로 국민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1953년 휴전 이후, 국민들은 관직자의 솔선수범을 효과적인 운동의 선결 조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1954년 10월, 사회부에서 차관회의에 상정한 ‘전시 생활 간소화 주간 설정의 건’이 부결(否決)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안에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무원들과 그 가족들이 국민 내핍 생활을 추진함에 있어 모범을 보이기로 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차관회의에서 “행정적 조치로 하되 위반 시는 징계한다.”라는 구속적 조문이 반대에 봉착해 부결되었다. 이로써 「전시생활개선법」과 그에 기초한 차후의 행정적 조치들은 사실상 공문(空文)이 되고 말았다.
「전시생활개선법」은 오일륙 군사 정변 이후인 1963년 9월 6일의 제91회 각의(閣議)에서 의결되어 “앞으로 시행될 개정헌법의 정신으로 보아 그 실효성과 타당성이 없게 되었으므로” 폐지되었다(법률 제1440호, 시행: 1963.11.05.).
「전시생활개선법」은 총력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후방에 있는 국민들에게 전쟁 수행에 적합한 생활 방식과 의식을 강제하려는 정부 노력의 발현이자 국가가 시민들의 기본권과 사적인 영역까지 관여하는 ‘생활 동원’이었다. 전쟁기 극심한 가난과 고통을 겪고 있던 국민 대중은 사치 풍조를 막고자 제정된 「전시생활개선법」에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 법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원인은 법의 제정과 집행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 지도층의 비협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생활 동원’의 성공에는 ‘상부 주도식 실천’이 선결되어야 함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