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회암영당 주희영정(江陵晦庵影堂朱熹影幀)」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南宋)의 유학자 회암(晦庵) 주희의 초상화이다. 고려 말 연경을 방문한 안향(安珦)이 주자서(朱子書)를 베끼고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해 오면서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주자학은 조선 건국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새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16세기에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 의해 주자성리학 연구가 심화되는 한편, 문인 집단 사이의 학문적 의견 차이가 정치적 대립으로 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자의 학문과 행적을 추숭하는 열기가 분출되면서 각지에 주자 제향(祭享) 공간이 생겨남에 따라 봉안용 주자 초상화의 제작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종류는 상용 형식에 따라 반신상(半身像)·전신입상(全身立像)·전신좌상(全身坐像)·전신의좌상(全身椅坐像) 등으로 나뉘며, 제작 기법에 따라 크게 목판화와 육필화로 구분된다.
「강릉 회암영당 주희영정」은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의 「주부자영정(朱夫子影幀)」과 흡사하다. ‘송태사문공회암주희선생진(宋太師文公晦菴朱熹先生眞)’이라는 존명(尊名)을 비롯해 상부에 묵서한 숙종어제찬(肅宗御製贊), 그리고 주인공 주희의 자세와 등받이의 청색 비단, 녹색 심의(深衣), 흑리(黑履)의 모양까지 거의 같다. 다만 회암영당본의 교의(交椅)는 전통적인 교의와 달리 의자와 족좌대가 연결된 특이한 형태이다.
이 초상화가 회암영당에 봉안되기까지는 장기간에 걸친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선 1778년(정조 2) 지역 문인 심상현(沈尙顯)이 나서서 충주 운곡서원의 주자 초상화를 이정(二程)과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을 배향하고 있던 하남재(河南齋)로 이안(移安)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사묘(私廟)인 하남재를 서원화(書院化)하려던 삼척 심씨 가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782년(정조 6) 하남재가 훼철되었고 초상화는 강릉 오봉서원(五峰書院)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오봉서원마저 훼철됨에 따라 연천 임장서원에 임시 보관중이던 초상화를 1887년(고종 24) 주씨 문중에서 별도의 자리에 회암영당을 짓고 가져다 봉안하였다고 한다. 전후 상황을 종합하면, 1778년 심상현이 운곡서원본을 모사해 왔고, 하남재로부터 오봉서원과 임장서원을 거쳐 1887년 회암영당에 안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존 회암영당본의 형식화된 필치와 채색법은 18세기 후반의 초상화풍과 거리가 있어 19세기 이후에 한 차례 더 모사하여 봉안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주희의 초상화는 그의 생존 당시에 이미 그려졌고, 사후에는 목판에 새겨져 그의 문집과 연보 등 각종 서적에 실려 중국은 물론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또한 원대부터 제작된 성현도상첩(聖賢圖像帖)의 유입도 조선 내에서 제작된 주자 초상의 모본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강릉 회암영당 주희영정」은 전신의좌상으로 그려졌는데, 안면의 모습은 명대 문인 섭공회(葉公回)가 편찬한 『주자연보(朱子年譜)』에 게재된 「태사휘국문공진상(太師徽國文公眞像)」과 흡사하다. 얼굴형을 비롯해 이마와 눈, 뺨 등의 굵은 주름살은 ‘주자 61세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특히 오른쪽 관자놀이 부분에 표현된 북두성 모양의 반점은 흑건(黑巾)과 심의를 착용한 점과 함께 주인공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징이다. 두 손을 모으고 앉은 공수 자세로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은 문인 관료들의 관복본(官服本)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16세기 이후 사림파(士林派) 세력이 부상하면서 가열된 주자 숭모열은 제향 공간을 증가시켰고, 그만큼 주자의 초상화도 많이 제작되었다. 역시 봉안용 초상화의 하나인 「강릉 회암영당 주희영정」의 제작과 전승 경로는 주자 초상화를 둘러싼 사회 문화적 맥락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상대적으로 양이 적은 전신의좌상 형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회화사적 의미가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