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중국 고대의 사상가로서,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확립된 유학사상은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아시아의 정치와 사상, 문화 등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는 공자의 일생과 행적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뽑아 도해한 일종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이며, 성적도(聖蹟圖)·공부자성적도(孔夫子聖蹟圖)·성적지도(聖蹟之圖)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성적도의 원천 자료가 되는 최초의 공자전(孔子傳)은 전한(前漢)의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史記)』의 「공자세가(孔子世家)」이며, 같은 책에 실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도 보조자료로 활용되었다. 초기에는 공자와 노자(老子)의 만남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단편적으로 그려지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생애의 주요 사건과 일화를 수십 폭에 도해한 공자성적도가 만들어졌다.
공자성적도에 앞서 공자영정(孔子影幀)이 제작되었음이 문헌기록과 현존 유물로 확인된다. 동진(東晋)의 고개지(顧愷之)와 당(唐)의 염립본(閻立本)이 공자상(孔子像)을 그렸다고 하며, 당대 오도자(吳道子)의 석각화상탁본(石刻畵像拓本)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공자의 일생을 여러 장면에 나누어 도해한 공자성적도는 원대(元代) 왕진붕(王振鵬, 1280~1329)에 의해 처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명대(明代)부터 본격적으로 도상화(圖像化)된 성적도가 제작되었고, 화가가 직접 그린 육필본 외에도 목각본, 석각본이 등장했다. 1444년 장해(張楷)는 29장면을 선정해 시각화하고, 각 장면에 『사기』의 내용에서 추출한 설명문과 찬시(讚詩)를 곁들였다. 1497년에도 하순(何珣)에 의해 하정서본(何廷瑞本) 혹은 홍치본으로 불리는 성적도가 제작되었는데, 장해본에 9장면을 추가한 38장면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홍치본 계통의 사본(寫本)으로 1506년에 쓴 발문(跋文)이 있는 등문질(鄧文質)의 성적도가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홍치본을 계승한 ‘선성소상(先聖小像)’이라는 제목의 성적도가 1598년에 제작되었다.
한편 동시기 최고의 인물화가로 꼽히는 구영(仇英, 약 15091551)이 그림을 그리고, 문인 서화가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이 제사(題詞)를 쓴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두 권의 화첩에 총 39장면이 실려 있는데, 대다수 명대 성적도와 달리 일부 장면이 새로운 장면으로 대체된 상태이다. 화첩의 말미에는 각각 1538년과 1540년에 쓴 문징명과 허초(許初)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곡부현사(曲阜縣史)』권30 ‘통편(通編)’에 의하면, 1592년 하출광(何出光)이 성적도를 돌에 새겼다고 하는데, 현재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의 공자묘(孔子廟)에 마멸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다. 제1석에 새긴 “성적지도(聖蹟之圖)”라는 표제에 이어 제3석~제8석에 관련 기문(記文)이 새겨져 있고 나머지 제20석까지 총 112장면의 성적도가 새겨져 있다. 이외에 만력연간(萬曆年間)에는 석각본에서 유래한 목각본도 생겨났다.
청대(淸代)의 공자성적도로는 1826년 고원(顧沅)이 간행한 『성묘사전도고(聖廟祀典圖攷)』에 실은 작품이 있다. 고원은 당시 전승되는 본들을 널리 수집해 비교한 다음 오류를 바로잡았고, 기존에 산발적으로 쓰인 각 장면의 제목과 설명문, 찬시 등을 그림과 조합하였다. 1874년에도 만력본의 중간본(重刊本)으로 보이는 성적도가 간행되었는데, 후에 대만(臺灣)의 영역(英譯) 성적도의 저본으로 활용되었다. 이상과 같이 공자성적도는 원대 이후 내용이 증감되면서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 공자와 제자들의 초상화가 유입된 시기는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수십 폭으로 유형화된 사례는 조선시대에야 알려진 듯하다. 더욱이 현존하는 유물은 모두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육필본과 목각본, 인쇄본으로 나뉜다. 그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은 원대 왕진붕의 성적도를 모본으로 삼아 1700년(숙종 26) 화원 김진여(金振汝)가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10폭의 『공자성적도』(국립전주박물관 소장)이다. 또 다른 육필본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동원기증품 『성적도』55폭과 성균관대학교박물관의 『성적도』6폭이 있다. 이들 작품은 1741년(영조 17) 이익정(李益炡)이 사행 길에 구해온 공자성적도를 화원이 베껴 그린 모사본(模寫本)의 일부로 생각된다. 그리고 1742년 1월에 완성된 『공자성적도』는 총 104폭이었고, 원본은 청대 여성부(呂聖符)의 그림을 목판에 새겨 찍은 채색목각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 목각본으로 화성 궐리사(闕里祠)의 104폭짜리 성적도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의 『공부자성적지도(孔夫子聖蹟之圖)』 등이 있고, 20세기 이후에 제작된 인쇄본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 성균관대학교 존경각 등의 소장품으로 전하고 있다.
공자성적도의 내용은 공자의 탄생에 얽힌 일화를 비롯해 공자의 인품과 외모와 관련되는 일화, 공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장면, 공자가 성인으로서 혜안을 드러낸 일화, 유학자이자 교육자로서 공자의 풍모를 보여주는 장면 등으로 구분된다. 전체 장면의 수나 구성, 각 장면의 제목 등은 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실상 원대 왕진붕본에 이어 38장면으로 제작한 명대 하정서본이 도상(圖像)의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하출광본에 이르면 112장면으로 증가하기에 이른다.
하정서본에 실린 38장면의 공자성적도는 선성소상(先聖小像)·니산치도(尼山致禱)·기린옥서(麒麟玉書)·이룡오로(二龍五老)·균천강성(鈞天降聖)·조두예용(俎豆禮容)·직사위리(職司委吏)·명명영황(命名榮貺)·직사승전(職司乘田)·학금사양(學琴師襄)·문례노담(問禮老聃)·재제문소(在齊聞韶)·안영저봉(晏嬰沮封)·퇴학시례(退學詩禮)·심행동거(心行同車)·협곡회제(夾谷會齊)·귀전사과(歸田謝過)·예휴삼도(禮隳三都)·의주정묘(義誅正卯)·인번거로(因膰去魯)·광인해위(匡人解圍)·추차동거(醜次同車)·송인벌목(宋人伐木)·미복과송(微服過宋)·적위격경(適衛擊磬)·서하반가(西河返駕)·진정준집(陳庭雋集)·영공문진(靈公問陣)·자로문진(子路問津)·재진절량(在陳絶糧)·자서저봉(子西沮封)·작가구릉(作歌丘陵)·행단예악(杏壇禮樂)·궤수적홍(跪受赤虹)·서수획린(西狩獲麟)·몽전양영(夢奠兩楹)·치임별귀(治任別歸)·한고사로(漢高祀魯) 등이다.